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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날씨가 좋다

by 장돌뱅이. 2025. 5. 17.

사람이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반드시 긴 만남의 시간이나 잦은 만남의 빈도가 필요한 건 아닌듯하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무렵에 짧게 만나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을 보면 그렇다.
하필 호우주의보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지는 저녁, 강남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창밖에서 난데없이 천둥소리가 우르렁거리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분위기는 더 오붓했다.

이제 나는 층층의 계급 구조에서 벗어난 백수이고 그들은 아직 그 속에서 어엿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변했을 뿐 오고 가는 대화는 그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서로를 안다는 건 명함을 주고받으며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보내는 사소하고 시시한 일상의 시간과 그 속에 드리운 삶의 그늘을 조금씩 알아가는 일이다.

바다를 향해 등대를 밝히듯 집집마다 거대한 어둠에 맞서 자기 별에 불을 밝혀, 대지는 서로에게 보내는 환한 신호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미 반짝이고 있었다.
(···) 그녀는 그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씨가 좋아, 당신 가는 길에 별이 쫙 깔렸어."

- 생텍쥐페리,『야간비행』중에서 -

입가심 맥주까지 하고 나오자 어느 덧 비가 그쳐 있었다.
비에 씻긴 공기는 산뜻했고 불빛을 머금은 도로는 아름답게 빛났다.
내일 아침에는 맑은 날일 거라 생각하며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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