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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멕시코 및 중남미

멕시코 국경도시로의 여행2(끝)

by 장돌뱅이. 2013. 2. 9.


 *위 사진 미국에서 멕시코로 넘어가는 국경


띠후아나 혹은 티후아나 TIJUANA

미국 샌디에고는 멕시코의 티후아나와 맞닿아 있다.
그 때문에 국경을 넘어서면서 사람들은 두 도시에 차이점을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우선 고르지 못한 노면으로 차체의 진동이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곳곳에 패인 곳이 
많아 샌디에고의 프리웨이에서처럼 매끈한 운전이 되지 않는다. 도로 주변의 깔끔치 못한 
조경 상태와 버려진 쓰레기, 그리고 오고가는 차에 치인 개의 사체도 눈에 띈다. 외곽지대의
산자락을 따라 조가비처럼 들어선 달동네의 집들도 보인다. 국경을 넘어서면 공기부터
달라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샌디에고의 맑고 투명한 공기가 티후아나에 들어서면
별안간 탁해진다는 것이다. 선입관이라고 처음엔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고
그런 생각에 젖어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매일 출근길에 벌써 3년째 보아온 터라 무심히 운전을 하지만 티후아나가 초행인
아내는 창밖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마치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한 듯한 충격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수년 전 내가 처음 출장으로 이곳에
들어섰을 때처럼 중얼거렸다.
"국경이란 게...국가란 게 뭘까?..."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흔하고 평범한 것 들에 대한 대한 물음이다.

티후아나의 원래 이름은 '바다가 가까운 곳' 이라는 뜻의 티완 TI-WAN이었다. 스페인
지배시기에는 티후안 TIJUAN 이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티아후아나 TIA JUANA(제인 아줌마 
라는 뜻)이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티후아나가 되었다. 1940년에는 인구 2만 명 정도였으나
해마다 급속도로 인구가 증가하여 1960년 경에는 18만 명, 이후로는 10년마다 2배 정도씩
늘었다. 현재의 인구는 250만 정도로 추산되지만 정확하지 않고 350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국경도시라는 지정학정 특정상 마낄라도라MAQUILADORA 라고 부르는 미국 시장을
겨냥한 보세가공 무역인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일자리를 찾아 각처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주말이면 티후아나는 쇼핑과 여흥을 즐기려고 국경을 넘는 미국인들로
북적였다. 특히 18세부터 술집 출입이 가능한 티후아나의 관대한(?) 법령은 (20세부터
음주가 가능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국경을 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
치안 문제가 대두되면서 외부 여행객이 급감하는 추세라더니 일요일의 티후아나 시내는
차량의 통행량이 별로 없이 한산했다.  

 

 


*위 사진 : 식당 라에스파냐다

미국용 네비게이터는 국경을 넘어서면서 영악스럽게 작동을 멈추었지만 우리는 목표로
했던 식당 라에스파냐다 LA ESPANADA를 찾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라에스파냐다는
주변의 멕시칸들이 추천해준 곳이었다. 티후아나서는 브런치로 널리 알려진 음식점이라 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한가한 거리와는 달리  북적이는 식당의 주차장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은 밥을 먹고 길을 걷고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 평범한 일상은
보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종종  어느 지역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치중되거나 과장되기
쉽다. 티후아나의 범죄가 심각한 상황이기는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속에서 날마다
아침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고 있다. 그 평범함이야말로
혼탁한 세상을 정화시키는 힘이자 세상을 이끌어온 원동력일 것이다.

아내는 멕시칸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주된 이유는 또르띠야 TORTILLA 때문이다. 
또르띠야 특유의 좀 콤콤한(나로서는 구수한) 냄새가  싫다는 것이다. 옥수수 반죽을
동그랗게 편 다음 구워서 여러가지 음식을 싸먹는 전병인 또르띠야는 그러나 멕시코 음식의
기본이다. 때문에 특별히 주문하지 않아도 거의 모든 멕시코 음식에 또르띠야는 자동으로
따라나온다. 또르따야에 고기, 내장, 야채 등을 싸서 먹는 음식이 바로 유명한 멕시코음식
따꼬(TACO)이다. 

라에스파냐다에서 아내를 위해 또르띠야가 없는 오믈렛을 시켰지만 역시 멕시코 스타일
이어서인지 아내의 입맛을 사로잡진 못했다. 그래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옆자리 손님의
호기심 섞인 친절한 환대를 받아가며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듯 했다.


엔세나다 ENSENADA 로
흔히들 멕시코땅을 긴수염고래 형상으로 생겼다고 한다. 칼리브해에 접해 있는 동쪽의 깐꾼
CANCUN 부근이 고래의 꼬리라면 서쪽의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바하 깔리포르니아
(BAJA CALIFORNIA 이하 '바하'로 약칭.) 는 고래의 수염에 해당된다.
바하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반도로  길이가 장장 1700킬로미터에 달한다.
그중에 우리가 하려는 여행은 단지 북부 일부 구간일 뿐이다.

식당에서 나와 본격적인 여행길에 올랐다. 시내를 서쪽으로 가로 지르자 바다에 가깝다는
옛 이름의 도시답게 곧 바다(태평양)가 보였다. 엔세나다는 바하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며
티후아나에서 남쪽으로 120 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항구이다. 현지인들은 LA BELLA
CENICIENTA DEL PACIFICO (태평양의 아름다운 신데렐라) 라는 별명을 붙여 놓기도 했다. 
또 태평양 연안을 운항하는 크루즈선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엔세나다까지는 일정 구간마다 돈을 내는 유료 고속도로를 택했다. 아내와 내가 평소
좋아하는 국도를 포기한 것은 안전문제 때문이었다. 사실 멕시코에서 외국인 사망 원인 중
가장 높은 것이 교통사고라고 한다. 게다가 상하좌우의 굴곡이 있는 해안도로의 곳곳에
속도위반을 노리는(?) 경찰아저씨들이 포진하고 있어 가급적 추월선이 아닌 주행선을
지키며 차를 몰았다. '노린다'는 표현은 경찰들이 더러 계도나 단속이 아니라 예전 우리나라
에서도 많이 있었던 '면허증 밑의 어떤 것 '을 탐하기 때문에 쓴 것이다. 

 

 

 

 

길은 오른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이어졌다. 샌디에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이어진 퍼시픽
하이웨이와 같은 길이었다. 아침 내내 하늘에 드리웠던 구름이 걷히면서 바다는 본래의
푸른 빛이 되살려내고 있었다. 더불어 해안을 향해 줄지어 밀려오는 파도의 흰 거품이 
점점 선명해졌다. 길 위에는 맑은 햇살이 눈이 시리도록 퍼붓기 시작했다. 햇빛은 캘리포니이
(깔리포르니아)와 샌디에고의 상징이다. 최인호는 그의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햇빛은 작은 미립자로 형성된 분말 같았다. 습기가 깃들어 있지 않은 햇볕이었으므로 쥐면
   바삭 부서져 버릴 것처럼 
햇볕은 건조해 있었다. 햇빛은 그늘 속에서도 빛나고 있었으며
   야자수의 열매 위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 그늘은 햇빛이 
눈부실 만큼 짙었지만 금박의
   햇볕은 비늘처럼 모여 있었다.

                                                                 - 최인호의 소설, "깊고 푸른 밤" 중에서 -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너른 해변과 수직의 절벽이 번갈아 나타났다. 덕분에 한가로웠지만
지루하지 않게 길을 달릴 수 있었다. 씨디를 밀어넣고 볼륨을 높이자 나른한 음율이 
차안을 채웠다. 제목이 'FEEL SO GOOD'이라고 아내가 웃었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그런 아내의 손을 잡아보았다. 매끄럽고 보드라운 느낌이 손안에 가득했다.  

 

 

 

 


*위 사진 : 라부파도라 입구의 가게들

여행의 반환점은 라부파도라 LA BUFADORA 라는 엔세나다 외곽의 바닷가였다.
부파도라는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해안의 바위 사이로 밀려들어오면서 좁은 틈을 통하여
분수처럼 수직으로 솟구치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서 바다 분수로 가는
길목은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식당이 줄지어 들어서 제법 시장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상점을 기웃거리다가 부파도라의 풍경 사진이 들어있는 작은 마그넷을 두 개 샀다. 
아내가 언제부터인가 여행지에서 사 모으는 것이다.  

 

부파도라의 파도는 기대만큼 크거나 높지 않았다. 계절이나 시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설사 바다 분수가 최고치를 만든다고 해도 풍경에 큰 기대를 품을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내와의 여행이 실망스러워진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 듯 아내와 나의 여행의 비중은 길 위에 있다. 

 

 

 

차를 돌려 오던 길을 되짚어 나와 다시 북쪽으로 향하면서 엔세나다 시내로 들어갔다.
포구 주변에 차를 세우고 어시장을 찾았다. 어시장 입구에는 피쉬 따꼬 FISH TACO를
파는 식당이 밀집해 있었지만 아내의 입맛 때문에 지나쳐야 했다.
시장엔 다른 어시장에서 볼 수 잇는 생선과 새우 등의 해산물로 풍성했다.
한 가게 앞을 지나는 데 점원이 우리를 보고 소리쳤다.
"전복 있어요." 
무심코 듣다가 문득 그것이 한국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샌디에고에 사는 한인들이 종종
이곳에서 횟감과 전복을 사간다고 하더니 그 영향인 모양이었다. 원래 생물은 미국으로
반입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으나 국경공무원에게 집에서 파티를 하려고 사가는 것이라고
미리 '자수'를 하면 대개 통과시켜준다고 했다. 잠시 아내와 조금 사볼까 망설였으나 단둘이
사는 처지에 그까짓 전복 때문에 미국 아저씨들에게 혀짧은 소리를 해가며 눈치볼 것
있겠냐는 결론을 내고 돌아서고 말았다. 

 

어시장 옆은 주로 고기잡이 배들이 닿은 항구였다. 작은 보트과 어선들이 정박해 있고
낚시꾼을 위해 임대를 해주는 배들도 있었다. 바다 한쪽에는 물개(바다표범? 같은 종인지
아닌지?)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된 데크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휴일을 맞은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누가 그랬다. 평화는 무관심이라고. 

 

 

과달루페 밸리 GUADALUPE VALLY는 엔세나다에서 차로 삼사 십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이곳은 바하뿐만 아니라 멕시코 전체에서도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다. 과달루페 계곡의
기후와 고도, 그리고 토양이 포도 재배에 이상적이라고 했다. 해안도로에서 안쪽으로 
깊숙히 차를 몰고 들어가자 길 좌우로 포도밭과 와이너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간 곳은 루이스 알베르토 세또 와이너리 L.A.CETTO WINERY 였다.  
무료와이너리 투어가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우리는 포도밭을 바라보다 와인 몇 병을
사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와인을 사는 것은 아직 내게 어려운 일이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몇몇 종류를 직접 테이스팅 해 본 후에야 입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었다. 

 

 

과달루페 밸리에서 다시 해안도로로 나와 북으로 달리다가 깔라피아 CALAPIA라는 호텔의
식당에서 랍스타를 먹었다. 사람들은 티후아나와 엔세나다 사이에 있는 푸에르토 누에보
PUERTO NUEVO라는 곳을  랍스타 먹는 곳으로 추천 하였지만 나는 좀더 시원한 전망을
가진 칼라피아의 식당을 염두에 두었다. 예전 출장 때 직원들과 와본 곳이기도 했다.  
북부 바하는 랍스타의 이름난 산지로 가을이면 랍스타 축제가 벌어지나 요즈음은 수확량이
줄어 대부분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구태여 이곳에서 랍스타에 연연할
필요는 없겠다. 아내가 멕시코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는 그나마 입에 맞다고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북미장무역협정 NAFTA 과 그 언저리의 나의 생활
식사를 마치고 나자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나는 유료 해안도로를 버리고 로사리또 ROSARITO 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1번 국도로
차를 몰았다. 휴일 오후의 티후아나로 들어가는 길이 병목 현상으로 밀린다는 귀뜸에
우회를 하기로 한 것이다.

1번 국도의 끝 지점은 티후아나의 외곽으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기업에서
투자한 공단이 있다. 90년 대 초 멕시코가 미국과 캐나다와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즉 나프타 NAFTA에 합의를 하면서 미국과
가까운 멕시코의 국경도시들에 대미수출의 생산기지로 들어선 공장들이다. 
이른바 '3초마다 텔레비젼 한대, 7초마다 컴퓨터 한대가 나온다' 는 마킬라도라 공단이
생겨난 것이다. 

국경 공단에 투자가 늘면서 일자리도 늘었고 멕시코의 대미교역량 증가와 더불어 수출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NAFTA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회의적이다. NATFA는 대내적으로는 모든 분야의 양극화를 고착화 시켰고 대외적으로는
국가경제를 외국(특히 미국)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90% 이상의 외국산 원자재와
중간재를 들여와 단순가공을 하여 내보내는 방식의 수출은 기술 축적이나 연관 산업의
발달을 창출해내지 못하고 국가의 경제성장과 국민의 실질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그마저도 수출 기업의 단 2%가 대미 수출의 80%를 차지하는 왜곡된 구조 속에서
이루어져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이 몰락하였다. 농업 또한 붕괴 되면서 실업율은 높아졌으며
비정규직은 증가하였다. 사람들이 NAFTA를 '악마와의 키스'라고 부르고 12개의 FTA를
맺은 멕시코가 2003년 더 이상의 FTA는 맺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공단의 한쪽에 나의 미국 생활의 근거지인 작은 공장도 있다.
어두워가는 저녁 먼 발치의 산 밑 공장을 가리키며 내가 일하는 곳이라고 하자 그곳을
바라보던 아내는 갑자기 눈에 눈물을 담았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남편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울컥한다고 했다. 나는 다시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걸 따뜻한 마음으로 담아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공단을 벗어나자 아침에 보았던 산허리의 달동네가 나타났다. 메마르고 척박한 모습은
어둠에 지워지고 이곳저곳 집마다 아침에 나간 사람들을 기다리 듯 따뜻한 불빛들이
옹기종기 피어나고 있었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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