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로스엔젤레스에 다녀왔다.
LA에 다녀올 때마다 느끼는 건 대도시의 번잡함이다.
샌디에고 '촌'에서 5년을 산 탓이다.
좁은 길, 빠르게 움직이는 차, 막히는 교통, 어지러운 간판들...
해서 네비를 켜고 가도 운전 중에 자주 장터에 나온 촌닭처럼 두리번거리게 된다.
비보호 좌회전의 타이밍을 놓쳐 뒷차로부터 빵빵거리는 경고음을 듣기라도 하면 더 정신이 없어진다.
샌디에고에선 좀처럼 없는 일이고 실수를 해도 웬만해서는 뒷차들이 조용히 인내를 해준다.
샌디에고가 좋은 건 여유 있는 찻길의 교통뿐 아니라
마을 가까이 걸을 수 있는 흙길의 공원이 많다는 것이다.
미션베이 가까이에 테코로테 (네이쳐 센터) 트레일이 있다.
왕복 4마일(6.4킬로미터) 정도로 한시간 반 정도면 걸을 수 있다.
평탄하고 부드러운 흙길이어서 걷기도 어렵지 않다.
텔로코테는 올빼미를 뜻하는 스페인말이다.
이 계곡에는 여러 종류의 올빼미와 새들이 산다고 한다.
샌디에고의 많은 트레일이 그렇듯 이곳 역시 오고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한가했다.
트레일을 왕복하는 동안 노인 한 분이 우리와 함께 걸었고,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달리기를 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두 명 자나갔을 뿐이다.
마을 가까이에서도 느낄 수 있는 깊은 적막.
간간히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그 적막을 깊게 했다.
그 사이를 "풀잎이 이슬 젖은 몸을 말리는" 속도로
"수련이 열었던 꽃을 닫는 걸음걸이로" 걸었다.
트레일 반환점 부근에 고압선 철탑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회화나무 아래 앉아 있다
시간은 내게 풀잎이 이슬 젖은 몸을 말리며
천천히 일어서는 속도로 왔다가
수련이 열었던 꽃을 닫는 걸음걸이로
나를 지나가는 게 보인다
멈추니까 시간이 보인다
속도의 등에서 내려 이렇게 멈추어 있는 동안
속도는 오늘도 정해진 궤도를 거침없이 달려가고
내 다시는 궤도의 끝자리에 다다를 수 없어
많은 것을 놓치리란 예감이 든다
생활은 다시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더 갔더라도 언젠가는 내렸을 것이다
내리니까 비로소 내가 보인다
내리고 나니까 가까운 이들의 얼굴이
꽃으로 보이고 꽃의 숨소리가 들린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으로
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나도 여기서 멈추고
더이상 진행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멈추어 선 숲도
언제나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고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저 산도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회화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고 앉아 있으니
하늘에 비친 세상의 얼굴이 보인다
-도종환의 시, "부드러운 속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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