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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다시 지리산

by 장돌뱅이. 2013. 4. 9.

새벽 네시.
서울에서부터 밤을 새워 달려간 버스는 노고단 아래 성삼재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새벽산행이면 늘 기대를 하고 올려다보는 하늘에 잔별이 가득했다.
이럴 때 별은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다.
바람은 제법 거센 아우성으로 검은 실루엣의 숲을 흔들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에 비해 바람의 끝은 부드러웠다.

어느 덧 초여름이다.
노고단으로 향하는 넓고 평탄한 길에 핸드 랜턴의 불빛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배낭의 끈을 당겨 조이고 그 대열 속으로 들어갔다.

옛 사람들은 지리산을 오악(五岳) 중의 하나로 삼고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산은 경외의 신성한 장소였다. 그 제사를 지내던 장소가 노고단(老姑壇)이다.
노고단 산장 너머 하늘로 푸른 새벽빛이 돌면서 랜턴의 불빛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별이 사라진 자리에 아침노을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했다.

반야봉에 가까워왔을 무렵 지리산의 준봉들이 새 아침의 첫 햇살을 받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에 씻긴 지리산의 봉우리와 능선의 초록이 한결 싱싱해 보인다.
새벽 예불을 마친 수도승의 얼굴 같다.

돼지평전과 임걸령을 지나 반야봉에 올랐다.
이틀 전에 비가 공기 중에 부유물을 걷어단 덕에 사방의 모습을 거침없이 볼 수 있다.
옛날 반야봉에 오른 서경덕이 “산은 다만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 천릿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일까” 했다더니 이 아침 내 경우가 그런 것 같다.
몇 번의 지리산행 중에 반야봉은 자주 지나쳤다.
그러나 이번에 올라가보니 천왕봉처럼 사람들로 들끓지 않아 한적하고 오붓하기가 그지없다.
언젠가 이곳에 앉아  지리10경 중의 하나인 반야낙조를 보리라.


*위 사진 : 연하천 산장 앞

연하천에는 1500미터의고지라는게 믿어지지 않게 물에 샘솟아 흐른다.
식사와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마치 장터거리에 온 듯 하다.
배낭을 벗고 나도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위 사진 : 벽소령

반야봉이 해넘이를 자랑한다면 벽소령에서는 달맞이가(벽소명월) 제 격이라고 한다.
내겐 아직 둘 다 보지 못한 꿈이다. 성삼재를 떠난지 다섯 시간이 다가오면서
다리가 뻐근해 오기 시작한다. 벽소령에는 무장공비들의 은신처를 방지하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70년대 초에 만든 군작전용도로가 지난다. 이제 그 효용성은 없어졌지만
지리산의 중앙부를 갈라놓은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위 사진 : 벽소령에서 세석고원에 이르는 길.

벽소령에서 덕평봉-칠선봉-영신봉을 거쳐 세석산장에 이르는 길은 오르내림으로 이어지는
힘든 구간이다. 그나마 무덤덤한 형상의 육산인 지리산에서 그나마 아기자기한 바위와
나무의 조화로움을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위 사진 : 세석고원 들머리.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는 촛대봉이다.


*위 사진 : 세석고원에서 거림골쪽을 본 풍경

세석고원은 이제까지 지나온 산길과는 확연히 다른 약 30만 평의 평원지대이다.
세석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한신주계곡으로 들어섰다.
편평한 세석고원과 달리 한신주계곡의 초입은 급경사의 길이다.
계곡의 시작답게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도시락을 까먹었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계곡은 넓어진다. 풍부해진 계곡물은 곳곳에서 폭포로 떨어지고
소(沼)로 깊어지기도 하며 흐른다. 한신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백무동과 만나게 된다.

백무동은 안개가 많이 끼어 (白霧洞), 무당이 많이 모여드는 골이라 하여 백무동(百巫洞),
전쟁이나 무기와 관련이 깊다는 뜻으로 백무동(百武洞) 등으로 해석된다.
모두 합쳐서 이해하면 맞는 말일 것이다.

성삼재를 떠난지 10시간 30분만에 백무동의 주차장에 내려섰다.
만만찮은 길이었지만 산은 늘 그래왔듯 뿌듯한 성취감으로 가슴을 채워 주었다.

하물며 지리산 아닌가.
아! 지리산.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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