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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44 - 봄을 보내는 꽃, 철쭉

by 장돌뱅이. 2013. 5. 22.

자연은 늘 있는 그대로 가치 있는 것이지만 팍팍한 샌디에이고의 산과 계곡길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철마다 아름다운 내 나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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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을 찾아서

올봄 내내 꽃을 쫓아다녔다. 작년과 재작년인들 봄 여행길에 꽃을 안 보았을 리 없지마는 이번에는 꽃 자체를 목표로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꽃만으로도 국토는 그 변화의 속도가 무척이나 숨 가빴다. 봄기운이 퍼지면 제 차례가 된 꽃들은 어김없이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듯 피어났다간 또 다른 꽃들에게 차례를 물려주면서 사라져 갔다.

동백에서 산수유로, 벚꽃으로, 진달래로, 복사꽃으로 그리고 철쭉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눈을 돌리는 사이 어느덧 봄이 다 지나가 버렸다. 제법 바쁘게 돌아다녔음에도 무수한 봄꽃 중에서 아내와 내가 만나고 기억에 담아둔 꽃이 단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국토의 넓고 깊음을 생각하게 한다.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철쭉을 보기 위해 남원의 바래봉과 정선의 두위봉에 올랐다.
철쭉은 진달래와 색과 모양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 둘은 몇 가지 서로 다른 특징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진달래는 철쭉보다 먼저 핀다. 진달래는 4월경에 꽃이 피고 5월 중순경 모두 지지만, 철쭉은 5월 중순에서 6월 초에 걸쳐 개화를 한다. 진달래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피고, 철쭉은 잎과 꽃이 비슷한 시기에 핀다. 꽃의 빛깔은 진달래가 진한 분홍색이고 철쭉은 연한 분홍색이다.

꽃의 크기는 철쭉이 더 크다. 또 철쭉은 꽃의 안쪽에 적갈색 반점이 있으나 진달래에는 없다.
진달래의 꽃잎은 먹을 수고 있고 술을 담글 수도 있지만 철쭉은 독성이 있어 먹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진달래는 참꽃이라 부르고 철쭉은 개꽃이라고 부른다. 철쭉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만주에서만 자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중부 이북 지방의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소백산철쭉제, 태백산철쭉제, 두위봉철쭉제는 이 꽃을 주제로 한 것이다.

이 두 식물과 비슷한 식물로 산철쭉이 있다. 물이 있는 계곡에서 자란다고 하여 수달래라고도 부르나 해발 1300미터 정도의 능선지대에서도 자란다. 잎 모양은 진달래에 가깝고 꽃에는 철쭉처럼 반점이 있다. 산철쭉의 색깔은 진달래보다 더 짙은 분홍색이다. 지리산철쭉제, 한라산철쭉제 등의 철쭉은 엄밀한 의미에서 철쭉이 아니라 산철쭉이다. 우리나라는 원래 진달래, 철쭉, 산철쭉등의 자생국으로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철쭉류의 유전자 중심지라고 한다.

최근에 길가나 공원의 조경용으로 많이 심는 개량종 철쭉은 왜철쭉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색상이 천박하다 싶을 정도로 화사하여 우리의 은은한 빛을 내는 철쭉과는 아름다움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불귀신의 잔치마당”, 지리산 바래봉
천왕봉에서 뻗어나간 지리산의 거대한 산줄기가 노고단에서 말발굽 형태로 방향을 틀어 비스듬히 치켜 올라간 능선의 끝자락에 솟아있는 바래봉은 매년 5월경 능선에 가득한 (산)철쭉으로 이름이 높다.
바래봉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삿갓처럼 생겨 삿갓봉이라고도 한다.

바래봉의 주능선길은 나무가 없는 초원지대이다. 1970년대 면양을 키우기 위해 바래봉 능선까지 찻길을 내고 면양 떼를 풀어놓았더니 면양들은 수목을 다 먹어치우고 철쭉만을 남겨놓았다.
철쭉은 독성이 있어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독이 있는 음식을 알아보는 짐승의 감각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바래봉철쭉이라고 하지만 철쭉은 바래봉 정상아래 1100m 부근의 갈림길에서 팔랑치로 이어지는 약 1.5km 구간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팔랑치로 오르는 경사면에는 선홍빛 철쭉이 드넓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팔랑치의 고갯마루는 붉은색 철쭉이 절정이었다. 안부에 걸린 목재 테크와 산정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만개한 철쭉 가지가 흘러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그 꽃 사이를 걸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꽃이파리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붉은 꽃이 온 산을 뒤덮고 있는 장관이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 속을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천국이 있다면 아마 이런 광경일 것이다.

- 강영조,『풍경의 발견』중에서 -

옛날 방목하는 양들을 위해 9부 능선쯤에 넓게 뚫어놓은 도로에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상춘객들로 가득하다. 한 때는 풍경 사진을 찍을 때 가급적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빼려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린 적도 있었지만 그런 모습도 풍경의 하나로 생각하기 마음먹고 난 후부터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무리 지어 피어난 철쭉 속을 걸으며 퇴계선생은 축융(祝融 불귀신)의 잔치에 취한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다 잔치에 초대받은 동등한 하객들인 것이다.

옛 탄광마을에 솟은 두위봉(斗圍峰)

정선군 신동읍을 지나 방제리를 통해 두위봉에 오르려니 등산로 한쪽에 “석탄더미에 묻힌 꿈”이란 글이 새겨진 비석 한 기가 눈에 들어온다. 뒷면에는 “함백광업소 산업전사 추모비”라는 제목 밑에 “반 세기 전부터 함백광업소 산업전사로 무연탄을 캐내며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몸소 이바지하다가 희생된 이들. 석탄더미에 소중한 꿈과 희망 숭고하게 드리우셨네. 눈 익은 두리뫼 너른 자락 품속에서 이제 고이 잠드소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제 폐광과 함께 꿈이 묻힐 석탄더미마저 사라져 버린 세상이 되었지만 척박한 세상을 열심히 살다 간 사람들의 억척스러웠던 삶마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마을 하늘에
눈이 내리면
끝없이 끝없이
눈이 내리면

까만 길 까만 지붕
눈에 묻히고
아버지 탄 캐는 소리
눈에 묻히고

하얗게 하얗게
눈이 내리면
우리 마을 하늘에
눈이 내리면

이 세상 슬픈 일들
눈에 묻히고
봄 소식 씨앗되어
고이 잠들고


- 임길택의 시, 「눈이 내리면」-

산죽군락과 박달나무 숲길을 걸어 아내와 내가 두위봉에 올랐을 때 철쭉꽃은 이미 절정을 한참 지나 끝물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라리고개에서 철쭉기념비가 있는 정상에 이르는 능선길 좌우에는 사람 키만 한 철쭉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지만 꽃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무성해져 가는 초록의 잎새 사이에서 연분홍빛으로 꽃잎을 물들인 철쭉은 그 숫자나 양에 관계없이 아름다웠다. 바래봉 (산)철쭉의 화사함과는 다르게 두위봉의 철쭉엔 품위 있고 고상한 은은함이 배어 있었다.

철쭉은 한자로 '척촉'이라고 하며 철쭉 척(躑) 자에 머뭇거릴 촉(躅) 자를 쓴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객(山客)이란 이름도 같은 맥락에서 생긴 이름이다.
아내와 나도 탄성과 함께 자주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철쭉으로 유명한 또 하나의 산, 소백산 등반 계획은 벌써 몇 년째 철쭉 시기에 시간을 낼 수 없어 올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내년을 위한 숙제가 되겠다. 언제부턴가 발길이 닿지 못한 국토의 모든 곳은 내게 늘 절실한 꿈처럼 다가온다. 절실하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는 사실은 그곳에 대한 사랑과도 같은 것이라 믿어본다.

(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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