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한국에 다녀 오는 동안(2010 .10) 아내와 영화 "작은연못"을 보았다.
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있었던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을 그린 영화이다.
전쟁은 무엇인가?
전쟁은 영화처럼 혹은 사실처럼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잘못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 수백, 수천, 수만 명이
죽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다.
천안함 이후 분위기는 마치 전쟁이 가까이 온 듯하다.
아니 와야 할 것처럼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속에서 보던 그 모진 전쟁살이를 또 겪으라는 것인지...
우선 그들에게 한 신문의 칼럼을 읽어주고 싶다,
전쟁을 원한다면 당신의 동생, 아들, 사위부터 전장에 내보내라.
아니, 당신도 방아쇠 당길 기운만 남아있다면 전장에 뛰어들어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전쟁의 'ㅈ'도 입에 담지 말라.
실제 전쟁을 할 능력도, 의지도, 배짱도 없지 않은가."
-경향신문 5월26일자-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한다.
저들은 정말 모두에게 파멸의 나락일 뿐인 전쟁을 염두에 두는 것일까?
그럴 "의지와 배짱"이 확실히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아니라고 믿는다.
저들은 그저 전쟁의 '분위기'를 빌려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의도일 게다.
그것은 너무 뻔한 것이다.
뻔한 것이어서 유치찬란하고,
유치찬란한 것이어서 더 끔찍하고 무섭다.
서럽고 애닮은 젊은 죽음들의 의미를 희롱하고 모욕하는
저 아수라들의 춤...
2007년 가을, 노근리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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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국토의 이곳저곳을 다닐 때의 느낌과 감성은 어느 외국을 여행할 때와는
분명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은 국토가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현장으로서의 국토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에 더하여
노동과 휴식, 뜨거운 사랑과 애타는 이별, 격정의 분노와 고요한 사색,
기쁨과 슬픔의 다양한 사연과 내력을 녹아있는 긴 강이고 드넓은 바다이다.
국토는 우리가 사는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늘 경쾌한 것만이 아니듯이 국토의 모습과 사연 또한 그렇다.
반세기 전 한국전쟁 중에 노근리에서는 미국 군인에 의한 주민 학살 사건이 있었다.
사건 자체는 물론 그 일을 다루는 이후의 과정은 그대로 우리의 지난한 현대사의 모습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홀가분한 주말여행에서 학살사건현장을 찾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학살의 원인이 되었던 전쟁이 아직도 평화로 끝맺음 되지
못했고, 가해자인 미군이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있는 현실을 돌아보면 영동 여행에서
노근리는 선택의 여정이 아니라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 사진 : 비극의 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비극의 현장이었던 경부선 철도 노근리 굴다리의
벽면에는 지금도 당시의 총탄 자국이 수십 군데나 남아 있다. 미군의 지시와 안내에 따라
마을을 떠나 피난 중이던 주민들은 철로 위에서 느닷없는 미군 비행기의 총격에 놀라
황급히 굴다리로 피신했고, 여기에 또 다시 무차별적인 기관총 사격이 퍼부어진 것이다.
총격은 무려 3일 동안 계속 되었다. 주민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해 시신을 뒤집어쓰고
피가 섞여 굴다리 안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을 유일한 식량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흘 동안 150명 이상의 사망자를 포함한 400명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다.
*위 사진 : 쌍굴다리 임구 콘크리트 벽에 아직도 생생한 당시의 총탄 자국
한국전쟁 직후 미8군 사령부는 미군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게 하는 방침을 세웠다. 피난민 중에 섞여 있을 지도 모를 ‘불순분자’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주민들은 미군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피난민들이었으며 이미
몇 차례의 짐 수색을 통해 농기구까지 압수당하고 미숫가루 등의 식량 따위만 지닌
상태였다.
1960년 10월 정은용씨 등 희생자들은 미국 정부에 노근리 사건에 대한 공식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청구서 제출했다. 그러나 처리기간이 지나 배상할 수 없다는 답신을 받았다.
그해 12월 재차 서신을 보냈으나 답신조차 받지 못했다. 그 뒤 5.16 군사쿠테타로
강압적인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노근리문제는 침묵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법으로 탈취한 권력의 유지를 위해 칠팔십 년대 이 땅의 군사독재자들로서는 ‘혈맹’인
미국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노근리 문제가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였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주민들의 집요한 노력 끝에 AP통신이 1999년 노근리 사건을
특종 보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노근리 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하게되자
그때까지 외면으로 일관하던 한.미 양국은 태도를 바꾸어 진상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2001년 1월 한미 양국에서 조사보고서가 발표되었고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의
성명서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미국은 노근리 양민학살의 가해자로서
의 책임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구상의 모든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온 미국으로서는 노근리 학살을 인정함으로써세계 도처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사건에 책임을 져야하는 ‘도미노 사태’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클린턴 성명서의 내용은 "일 년여에 걸친 조사를 통해... 비록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를 분명히 하기 불가능하지만...한미양국조사반은...무고한 한국 피난민들(innocent
Korean refugees)이 죽거나 부상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피해자의 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 미국은 깊은 슬픔과 유감과 동정"을 표시한다고 되어 있을 뿐이다.
미국은 이 사건을 ‘우발적인 사고’ 라고 주장하지만 미군의 명령지휘계통이
전혀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피난민들이 미군의 지시에 순종하고 있었던 만큼
의도적인 살인행위 이외에 어떤 ‘우발적 상황’이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교전지역 주민들이 적군에게 호의적이었다거나, 설령 어제까지 아군에게 적대적이었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오늘 당장 미군에 대해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즉결
처형하는 것은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미국 군사법원의 베트남 미라이 사건
판결취지이다. 즉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비무장/무저항의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피난민들로부터 적대적인 행위가 전혀 없었으며
긴박한 교전상태도 아닌 가운데 저질러진 노노근리사건은 명백한 전쟁범죄행위이다.
- 박선원,「미국의 노근리사건 최종보고서 비판」-
노근리 현장을 지휘했던 한 미군 소대장은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어 죽은 일본인들을
우리가 보상해야 하는가?…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피를 흘린 우리 미군에게 보상과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역겹다"고 했으며, 한미공동발표문 관련 기자회견에서 국방장관
윌리엄코언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에 끼친 자신들의 공로를 생각하여 피난민
살상 사건 정도는 감사히 묻어 둘 줄 알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고 한다.
우리를 보는 저들의 오만한 시각과 자세를 보여주는 실례가 되겠다. 양국간의 건전한
관계는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와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는 엄정함 속에서 더욱 굳건해 질
수 있는 것이지 범죄행위조차 눈감아 주는 ‘공범의식’ 속에서 구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나 집단은 없는지 생각해
보게도 된다.
*위 사진 : 쌍굴다리 근처 언덕에 세워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위령비
노근리나 광주민중항쟁 같은 비극적, 역사적 사건을 대할 때마다 그 올바른 정리를 위한
어떤 원칙을 상식적인 수준에서나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실규명과 화해,
그리고 전달의 원칙이다. 뜻밖에 많은 오해가 이 간단한 상식을 지키지 않아 일어난다.
사실규명은 문자 그대로 어떤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법적, 도덕적 평가와 처리가 뒤따라야 한다. 화해는 한 사회가 육중한 사건의
무게를 털어내고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가해자의 참회와 반성이
피해자의 용서에 앞서 이루어져야 한다. 참회와 반성은 개인적인 것과 함께 그 사건을 있게
한 사회적 토대나 구조에 대한 바로고침의 과정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진실과
교훈을 기록하여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 아픔과 충격을 비용으로 지불하며 얻은
교훈을, 흔히 말하는 것처럼, 용서하되 잊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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