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떠나기
덥다. 언제 물난리가 있었나 싶게 하늘은 매일 불볕을 토해낸다.
아침부터 가마솥의 조짐을 보이는 날씨 속을 걸어 출근길을 나서다
보면 훌쩍 숲그늘이 짙게 드리운 계곡으로 달려가 시린 물에 발을
담그고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천길 벼랑에 옷을 걸고
만리로 흐르는 물에 발을 씻는다
허풍스럽게 느껴지던 옛 중국인의 글귀가 그럴 땐 호쾌하게 와 닿는다.
내게 모든 종류의 날씨는 여행(등산)을 할 이유를 갖고 있는 듯 보인다고
아내와 딸아이가 말한 적이 있다. 날이 맑으면 맑아서, 흐리면 구름이 때문에,
비가 오면 분위기가 있어서, 추우면 오붓해서, 바람불면 시원해서 떠나야
한다고 자기들에게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
언젠가 울산에 살 적에 태풍이 지나가는 밤바다를 보기 위해 식구들과 집을
나선 적이 있다. 인적이 없는 해변 가까이 차를 세우고 유리창 너머 먼 발치로
거대한 파도가 지축을 흔드는 굉음으로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빗물과
바닷물이 함께 차위로 쏟아져 내렸다. 딸아이는 태풍의 위력에 공포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날 저녁 누군가 우리 가족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면 미친 인간들이라고 혀를
찼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태풍의 시간이 아니면 보지 못할 바다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지구 최후의 날이라도 온 것처럼 혼란과 아우성이 가득한 바다.
우리는 안온한 차안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안전을 확보하고 있을 때 위험한
경관은 즐거움이 되고 우리는 기꺼이 그 위험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가는 법이다.
아내는 종종 그런 나의 행동을 치기어린 것으로 평가하고 걱정스레 바라보곤 한다.
그럼에도 이번처럼 산행을 제의했을 때 말로는 “이런 더위에?...” 하고 놀라는 척
하면서도 알아서 음료수를 얼리고 등산복을 챙기는 것을 보면 아내에게도 어느 덧
모든 종류의 날씨가 길을 떠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나 보다.
강촌 삼악산
삼악산은 강원도 춘천에 있는 높이 654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다.
경춘가도와 의암호, 그리고 북한강을 끼고 있어 능선에서의 조망이 뛰어난
산이다. 등선폭포가 있는 기암괴석이 곧추선 협곡과 이어지는 숲길이 이룬
조화가 아름다원 흔히 “설악산의 빼어남과 오대산의 웅장함을 모아서 축소”해(
사람과산) 놓은 듯한 산이라고 부른다.
아내와 나는 강촌역 맞은 편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선폭포쪽 계곡을
산행의 들머리로 잡았다. 계곡의 입구에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밀집되어 있어 다소 어수선해 보이지만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수직으로 선
바위 절벽 사이로 난 길을 지나게 되어 깊은 계곡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된다.
등선폭포는 10미터 정도의 낙차를 지닌 폭포이다.
폭포에서 구름다리를 오르면 선녀탕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바위 웅덩이가 있다.
폭포로 떨어지고 웅덩이를 굽이치는 물소리가 좁은 계곡 안에 시원하다.
계곡을 빠져나오면 평범한 숲길이 흥국사 까지 어어진다.
흥국사는 신라 때 고찰로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잠시 숨어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후 70년대에 새로 지은 탓에 고찰의 맛은 풍기지 않는다.
흥국사를 옆으로 난 길을 오르면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관문인 333개의 돌계단을
지나게 된다.
정상인 용화봉에서 상원사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급경사의 바위길을 쇠줄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하산길 내내 의암호의 푸른 물을 볼 수 있어 좋다.
더운 날씨에 계단을 오르거나 가파른 바윗길을 내려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더위에 달구어질수록 미세한 바람결조차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몸은
예민하게 변하게 된다. 바위에 걸터앉아 땀을 훔칠 때 살포시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은 더없는 행복이다. 선조들이 물려준 이열치열의 지혜란 그런 것일 게다.
산이 많은 국토에 산다는 것은 산을 좋아하는 내겐 늘 행운같은 일이다.
가평 석룡산
석룡산은 널리 알려진 산이 아니다. 근처의 화악산이나 운악산, 명지산, 연인산
등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지는 산이다. 특별한 경관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평군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외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요즈음 들어보면 축복의 다른 이름이 된다.
사람들이 드물게 찾은 탓에 자연 본래의 모습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산 자체보다도 산이 품고 있는 조무락골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계곡이 무공해 청정 지역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 같다.
조무락골이 있는 가평군 북면 일대는 가평천의 상류지역으로 석룡산 이외에도
해발 천미터 이상의 준봉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그런
가평을 “사람이 살기가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70년대까지 사람들은 이고까지 들어와 화전을 일구고 살기도 했다.
조무락골은 한자로 새 조(鳥), 춤출 무(舞), 기쁠 락(樂)으로 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있어 ‘새들도 즐겁게 춤추는 곳’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가평에서 75번 국도를 타고 차로 30분쯤 달리면 가평군 북면 적목리의 38교라는
다리에 이른다. 이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조무락골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피서철이다 보니 계곡의 초입은 벌써 사람들의 차지가 되어있다.
울긋불긋한 텐트와 물놀이 기구들이 눈에 뜨인다. 옛 산행 지도에 '마지막
농가'라고 표현되어 있는 곳에는 조무락이라는 이름의 서양식 목재 건물이
들어서 있다.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듯 했다.
조무락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한낮임에도 울창한 나무 때문에
햇빛이 들지 않아 길은 축축하고 어둑했다. 계곡의 물은 힘찬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맑고 깨끗한 물이었다. 산을 오를수록 피서객들도 보이지 않았다. 40분쯤 오르자
계곡 두 갈래로 갈라졌다. 오른쪽 지류로 10여 미터를 오르자 조무락골의 최고 절경
이라고 하는 복호동폭포가 나왔다. 30미터 가까운 3단의 폭포는 장마 덕분에 수량이
풍부해 볼만했다.
폭포 아래서 얼굴을 씻고 등산화를 벗어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하기 그지없다.
폭포에서 20분쯤 오르면 화악산과 석룡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의
석룡산으로 향하면 그때부터 길은 계곡과 멀어지면서 부드러운 흙길로 변한다.
경사가 있지만 힘에 겨울 정도는 아니다. 석룡산의 높이가 1155미터인 것을 감안하면
산세는 부드러운 편이다. 풀냄새가 향기로운 길옆으로 갖가지 야생화가 예쁘다.
얼마 전 영국의 한 대학교수가 세계행복지도란 것을 발표했다. 행복지도는 한 국가가
국민 건강과 생활 만족을 위해 자원을 얼마나 적절하게 쓰고 있는지를 중시하여
소득이 높고 평균수명이 길더라도 환경 훼손이 심한 국가는 순위를 낮추고,
자국 문화 및 전통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가 높으면 올렸다고 한다.
행복지도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 순위는 178개국 가운데 하위권인 102번째였다.
경제 규모는 세계 11위라지만 행복 순위는 바닥인 셈이다. 최악의 상태를 겨우
면한 듯 보이는 우리의 삶은 위태로워 보인다.
그 순위의 객관성이나 적절성을 따지기에 앞서 환경과의 관계를 행복의 주요 요소로
삼았다는 점이 신선해 보인다. 절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난 후의 삶의 질이란 맑은
햇빛과 맑은 공기, 깨끗한 물과 흙에서 살수 있는 생태학적 환경의 질에서 1차적으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석룡산을 오르내리며 공기도 맛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우리나라는 ‘산소부족국’이라고 한다. 1차적인 산림녹화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더불어 자연의 파괴도 가속화되어 국민이 숨쉬는 데 필요한 산소의 80% 이상이 다른
나라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러다가 누군가 공기의 ‘원산지소유권’을 들고 나온다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신선한 공기를 수입해야 하는 만화같은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하여 이혼율도 자살율도 줄여야겠지만 더불어 인간의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장한 세월이 만들어놓은 자연에 대한 관심과 공존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흔한 말이지만 자연은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후손들에게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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