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혼련소의 기억
아내와 논산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논산훈련소를 떠올렸다. 우리나라 20대 젊은이들의 공통된 관심사이자 고민거리이며, 어떤 형태로건 통과해야 하는 ‘군대살이’의 첫 단계를 상징하는 논산훈련소.
99년 이래 정식 이름은 육군훈련소이고 그 이전에는 제2훈련소라고 불렀다.
제1훈련소는 한국전쟁 중에 제주도에 세워졌다고 하던가?
70년대 말 대학 4학년의 조금 늦은 나이로 나도 그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유신헌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이미 병영인데 새삼스레 군대라고 해서 뭐 다를 게 있겠냐'고 흰소리를 해대며 신체검사장의 판정관 앞에서 먼 전방으로 보내달라고 치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말과는 달리 그 시절 군대란 단어는 뱃속 한가운데 자리잡은 해묵은 체증처럼 은근하게 의식의 저변을 누르는 부담이었다.
장돌뱅이님이 군대를 가는 날 성북역으로 나갔다. 나는 친구에게 '대출'을 부탁했다. 평소에 장돌뱅이님이 예쁘다고 했던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하루사이에 빡빡 까까머리가 되어서 머쓱한 표정을 짓던 장돌뱅이님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애인이 울지를 않는다고 푸념을 하며 애써 밝게 떠났다. 울지 않던 그 애인은 집에 와서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 곱단님의 글 중에서 -
성북역을 떠난 탄 기차는 저녁 무렵 논산에 도착했다. 이제 본격적인 군대로 들어간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두런거림이 한층 잦아진 동기들과 함께 낯선 거리를 걸어 훈련소 인근의 수용연대란 부대로 들어갔다. 거기서 훈련소로 가기 전까지 다시 신체검사를 받고, ‘줄 잘못 선 죄’로 사역도 하며,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장정’이란 이름으로 10일 가까이를 ‘썩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곧 그 ‘썩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원산폭격’이나 몇 차례씩 연병장을 가로지르는 ‘선착순’에 숨이 차오르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국방부시계는 돌아가고 있다(어쨌든 제대 날짜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뜻)’는 사실을 누구나 몇 그릇의 ‘짬밥’만으로 눈치 빠르게 깨닫게 되었으니까.
본격적인 ‘사제(私製)물 빼기’는 아무래도 훈련소에 입소하면서 시작되었다. '훈병'으로 호칭이 바뀐 우리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눈썹이 휘날리도록’ 혹은 ‘구두 탄내가 나도록’ 바쁘게 달리며 훈련을 받았고, ‘야전삽 하나로 막사를 짓고, 거시기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군기’를 다듬으며, ‘논산 보고는 오줌도 안 싼다.’는 훗날 과장된 ‘군대이야기’로 남게 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보름달빵이나 짜장면으로 통일되고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뼈가 지하에 훈연하니..." 하는 올드패션의 훈련소가(歌) 대신에 구전으로 내려온 ‘영자송(SONG)’에 철모를 두드릴 줄 아는 ‘진짜 군바리’가 되어갔던 것이다.
영자야 내애 동생아 몸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여기에 있는 이 오빠는 내무반장이 아~니란다
여기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도 아~니란다
논산하고도 훈련소에서 뺑이 치는 쫄따구란다
라일락 한송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그곳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낭만이 깃들어 있을 듯한 주소. 그때 ‘사제인간’들에게 편지를 쓸 때면 몇 중대 몇 소대라는 군대식 주소 대신에 그런 식으로 내 소속을 밝혔던 것 같다.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 봉투에 라일락이라는 단어를 적다 보면 오월의 교정에 퍼지던 라일락 향기가 코끝에 하늘거리듯 되살아오면서 땀내 나는 훈련복에 갇힌 젊음이 문득문득 서러워져 오곤 했다.
두 백제의 마지막 놀뫼(黃山)
논산은 원래 ‘누런 땅’이라는 뜻의 놀뫼(黃山)라고 불렀다고 한다.
평야가 넓은 지역이다 보니 땅의 빛깔을 따라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놀뫼는 비옥한 땅에다가 금강 줄기를 따라 포구까지 형성되어 사람과 물자의 출입이 편리한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미 삼국시대 이래 각국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왔다. 백제와 후백제가 각각 신라와 고려와 맞서 싸우다 끝내 패망하고 만 격전지가 바로 이곳 놀뫼 즉 황산벌이다.
백제의 마지막을 이야기할 때 부여 낙화암의 슬픈 전설 이전에 우리는 황산벌을 떠올리게 되고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백제의 계백장군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660년 나당군의 대침략에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나섰다
나서기도 전에
제 일월도로
아내와 자식의 목을 쳤다
황산평야의 대회전에서
김유신의 군사 5만과 대적
격전으로 네 차례 방어했으나
마지막 총공격을 받고 싸우고 싸워 죽었다.
멸망 앞에서 결단은
모든 결단을 종합하는가
이상하도다 백제 유민은 오랫동안
멸망한 날을 기념해 왔다
세상에 멸망의 날을 기념하는 자는 없는데
백마강 유역에는
그런 일이 있다
거기에 계백이 피 묻은 채 이어져온다
-고은의 시, 「계백」-
정작 계백 장군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위에 인용한 짧은 시의 내용이 그에 관한 전부인 듯하다. 역사 속에 계백은 홀연히 장군으로 등장하여 장군으로 사라진다. 장군 이전도 이후도 없다. 태어난 시기와 장소도 없고 성장한 과정도 없다. 백제의 마지막을 지킨 장군이지만 그 마지막 순간도 전해 오지 않는다. 패망한 나라의 장수에게는 그런 모든 것이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계백은 싸움터로 나가기 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내와 자식의 목숨을 거두었다.
뒤돌아볼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삶과 역사에 대한 몰입과 결단.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중)에서 패전을 예감한 절망의 몸짓보다는 절망에 맞서는 용기와 슬프고도 비장한 사랑을 읽게 된다. 전설 속의 장산곶매가 그랬다던가. 밤을 새워 자신의 둥지를 부순 후에야 멀고 거친 대륙으로 큰 싸움을 떠난다는 장산곶매.
사로잡은 16세의 어린 적군, 관창을 여러 번 살려 보냈다는 너그러움은 사실이라면 그런 극한의 감정을 뛰어넘은 계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은 처절했을 것이나 적어도 계백이 있어 추해 보이지 않는다.
계백과 오천 결사대가 최후를 마친 놀뫼땅 수락산 언덕에 계백의 무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무덤으로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어 전해오다가 1965년에야 비로소 그의 것으로 인정(?)되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채 어떤 능묘 조각품도 없는 둥그런 봉분과 비석하나가 있을 뿐인 한적하고 조촐한 곳이었으나 이제는 주변에 기념관이 들어서고 넓은 잔디밭과 벤치가 늘어선 큰 공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지난날의 비장함이나 처절함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계백의 묘 앞에 서서 잠시 고개 숙이고 눈을 감았다.
서기 660년 백제는 그렇게 멸망했다.
그러나 황산벌을 적신 계백의 피처럼 백제의 유민들은 그 멸망의 순간을 가슴속에 깊이 품어 두었던 모양이다. 신라 말기인 진성여왕 6년(892년) 스물여섯의 젊은 청년 견훤(甄萱)이 무리들을 모아 마침내 ‘후백제’란 이름을 들고 깃발을 들었을 때 주민들은 열광하며 그를 따랐다. 견훤이 외쳤다.
"신라 김유신은 당병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비겁한 일이다. 나는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을 풀려는 것뿐이다.” 이 말에 주민들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다. “백제를 다시 일으키자.”
- 최명희의 소설, 『혼불』제8권 중에서 -
백제가 멸망한 뒤 무려 이백삼십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백제 유민들은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백제를 가슴속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견훤의 후백제는 후삼국 중에서 한때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으나 왕위 계승문제로 자식들과 내분이 벌어지면서 국운이 기울게 된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견훤에 불만을 품은 큰아들 신검(神劍)이 자신의 아버지를 김제의 금산사에 가두고 왕권을 탈취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폐 삼 개월 만에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태조 왕건에게 투항을 하게 된다. 이후 신검은 견훤이 지켜보는 황산벌에서 10만의 왕건의 군사에게 제대로 대적 한번 해보지 못하고 쫓기다 항복을 하고 만다. 후백제 건국 45년 만의 일이었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숙적이었던 세력의 힘을 빌어 멸망시켜야 했던, 그리고 그 멸망의 현장을 직접 지켜보아야 했던, ‘가련한 완산의 아들(可憐完山兒)’ 견훤은 “못난 놈”이라는 누구에겐지 모를 울부짖음을 토하며, 울분과 번민으로 괴로워하던 끝에 후백제가 멸망한 얼마 뒤 일흔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완산주(지금의 전주)가 건너다 보이는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의 언덕에 그의 무덤이 있다. 임종 시 완산이 그립다 하여 이곳에 묘를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언덕을 오르기 전 길옆 안내판에 “견훤왕릉”이라 쓰여 있었다. 견훤왕릉? 견훤과 왕이라는 단어의 결합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깨달음.
“그래. 견훤이 왕이었었지!”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읽은 모든 책에서 후백제의 왕 견훤을 늘 ‘견훤’으로만 불렀지 ‘견훤왕’으로 부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른바 ‘승자의 기록’이 전하는 정서에 아내와 나도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패망한 군주로서 견훤은 궁예와 더불어 ‘뭇도적 중의 한 사람일뿐’(삼국유사)이라고 그려지고 있지 않았던가.
서울 주변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견훤왕릉은 봉분의 크기로만 보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직경이 10미터에 높이가 5미터, 둘레가 83미터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다만 다른 석조 장식물이 전혀 없이 1970년 견 씨 문중에서 세웠다는 묘비만 서 있어 좀 썰렁해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놀뫼는 군대와 깊은 인연이 있는 땅인가 보다.
천년 전에 두 백제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지은 치열한 전투가 지나간 땅에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부대’라는 육군훈련소가 위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놀뫼란 우리 이름 대신에 논산이란 새 이름으로 바뀌어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1914년 일제는 놀뫼의 소리에 가까운 한자를 골라 논산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원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름으로 지명 역시 ‘창씨개명’을 당한 것이다.
개태사와 관촉사
고려의 태조 왕건은 936년 후백제 신검을 굴복시키고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직후 격전지였던 황산벌에 기념사찰로, ‘태평한 시대를 연다’는 뜻의 개태(開泰)사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개태사를 품고 있는 황산(黃山)의 이름을 ‘삼국통일은 하늘이 도와주었다’ 하여 천호산(天護山)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왕건은 삼국통일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지방의 호족 세력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건은 그들을 확실히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고 왕실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방 호족의 딸 스물아홉 명을 후비로 맞아들였고 그 부인들한테서 난 왕자와 왕녀를 다시 호족들과 결혼시켜 서로 혈연으로 얽히게 하였다.
개태사의 창건 동기도 이 지역의 저항 세력을 달래고 위로하여 끌어안으려는 포용력과 더불어 정복자로서 당당한 자신감과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려는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창건 당시에 조성되어 지금도 법당 안에 모셔진 세 구의 불상에 자비한 부처님의 인상이라기보다는 굳은 인상의 고려 무사 같은 느낌이 강한 것도 지배층의 그런 의지가 반영된 때문이라고 한다.
개태사에는 지름 3미터의 거대한 무쇠가마솥이 있다. 왕건이 절을 세우고 승려 500명의 밥을 지을 솥으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많은 승려가 머물 정도로 크게 번창하던 개태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지금 들어서 있는 절 건물들은 모두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논산시 관촉동에 있는 관촉사(灌燭寺)는 키가 1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돌부처로 유명하다.
관음보살상임에도 사람들 사이에 흔히 ‘은진미륵’으로 불리어진다.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기이해 보이고, 강인한 눈빛과 두꺼운 입술의 거대한 얼굴과 튼튼해 보이는 몸통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해 오면서 어떤 위엄을 느끼게 한다.
고려 제4대 왕인 광종19년(918년) 세워진 이 미륵불 역시 백제와 후백제의 유민 의식이 가시지 않은 논산 지역의 사람들에게 대한 고려 왕권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상징물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두 백제의 마지막 무대인 황산벌을 굽어보는 자리에 미륵불을 세운 것도 그런 이유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굳이 수십 리 떨어진 연산면에서 천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큰 돌을 옮겨오면서까지 지금의 자리에 불상을 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강경 미내다리(渼奈橋)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살았을 적에 연산(개태사)의 가마솥과 은진(관촉사)의 미륵과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논산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언젠가 닥칠 면접시험(?)이므로 ‘기출문제’(?)는 확실히 짚어 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강경으로 들어섰다.
강경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젓갈상점의 간판이었다. 특히 옛 포구를 중심으로 대형 ‘젓갈백화점’들이 연이어 서있었다. 젓갈은 이제 타지의 사람들이 강경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유일한 특산물인 듯 보였다. 해마다 늦가을이면 젓갈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 뱃길이었을 시절 그리고 금강 바닥이 지금처럼 흙모래가 쌓여 얕아지기 전까지 강경은 평양, 대구와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였다. 해상과 육상교통의 요지로 하구의 돛단배들이 실어온 싱싱한 해산물을 내륙으로 보낼 수 있었고 또 내륙의 특산물 또한 강경을 통해 다른 곳으로 실어낼 수 있었다. 때문에 강경은 갖가지 물산과 사람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리던 곳이었다. “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옛날 돌다리를 놓는다는 일은 웬만한 경제적인 기반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돌다리는 대부분 궁궐이나 큰 절 입구에 있기가 쉽다. 그러나 강경천변의 미내다리는 물자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민간의 소용에 의해 영조 때(1728년) 건축된 다리다. 그 시절 강경 사람들의 경제력을 짐작케 하는 유적이라 할 수 있겠다.
미내(渼柰)는 강경천의 옛 이름이다. 그러나 미내다리는 강경천을 건너는 다리가 아니라 강경천 둔치에 둑과 나란히 놓여있다. 물 위에 있는 다리가 아니라 그냥 평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원래는 강경천의 지류를 건너는 다리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강경천을 정비하면서 지류가 막히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다리는 해체 후 2003년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박제품처럼 단순히 전시하기 위한 다리지만 외곽의 선이 부드럽고 모양이 아름다웠다. 30미터의 길이를 따라 무지개 모양의 수로가 3칸으로 나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정교하게 다듬은 돌이 빈틈없이 쌓여 꼼꼼한 솜씨를 드러내고 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아내는 다리의 이쪽과 저쪽을 계속해서 왕복하며 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내판에 정월대보름날 이 다리를 자기 나이만큼 왕래하면 그 해의 액운이 소멸된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대보름은 물론 한가위가 지난 지도 한참이었지만 나도 덩달아 아내 뒤를 따르며 시기에 맞지 않는 답교놀이를 시작했다. 문제는 아내와 나의 나이를 합하면 100살에 가까운 터라 제법 오래 걸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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