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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50 - 강진에서 장흥으로

by 장돌뱅이. 2013. 5. 25.

새벽 네 시. 캄캄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었다.
세 시경에 일어나 한 시간
가까이 떠날 채비를 하였지만 여전히 졸린 기색이
역력한 딸아이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뒷좌석에서 이내 잠에 빠졌다.
아내와 나는 손바닥을 부딪치며 출발을 외쳤다.

오늘의 목적지는 전라남도 장흥 천관산(天冠山).
아내와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은 했었지만
거리가 만만찮아 매번 미루어왔던
여정이다.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내변산과 함께
호남5대 명산으로 불리는
천관산은 가을이면 능선에 피어나는 억새와 아기자기한
남해안의 조망,
그리고 마치 화려한 ‘하늘의(天 ) 관(冠)’을 머리에 쓴 듯한 비죽비죽한

정상부의 바위 등으로 유명한 산이다.


*위 사진 : 천관산의 억새

아내와 내게 천관산행은 정선 민둥산, 포천 명성산, 홍성 오서산, 밀양 제약산,
양산
신불산, 등의 이른바 ‘억새 산행’의 일차적인 순례를 마무리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거기에 평소 산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딸아이가 선선히
동참의사를 밝힌 것은 아마 나의 미국 주재와 자신의 취업으로 앞으로
당분간은 온 식구가 함께 여행하는 기회가
쉽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진의 백반집, 수인관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도로 옆의 들에는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었다. 희뿌연 아침 안개가 빈 들판
끝에 머물러 있었다.
유난히 이른 새벽에 출발을 한 것은 천관산이 위치한
장흥까지의 거리가 만만치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가는 길목에 있는 강진의
음식점 수인관에서 ‘아점’을 먹기 위함이었다.
수인관은 같은 동네에 있는
설성식당과 함께 전라도식 백반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위 사진 : 수인관의 상차림

작년 여름 강진에 들렸을 때 설성식당과 수인관을 두고 고민을 하다 설성식당
으로
결정한 뒤에 수인관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그것은 설성식당에
실망을 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음식과 가격에 크게 만족을 했기 때문이었다.
설성식당과 같은 음식을 낸다는 수인관도 섭렵하고 싶은 욕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때 수인관을 들르지 못한
이유는 일정의 촉박함 때문이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끝에서 2번 국도를 갈아타고 동쪽으로 달려 해남을 지나
강진에 닿았다. 수인관은 설성식당처럼 한 상 (4인 기준)에 2만원하는 백반을
차려낸다. 한 사람당 오천원 꼴인 셈이다. 음식의 구성도 설성식당과 같다.
돼지고기 양념구이와 조기구이, 쭈구미데침,
바지락국 등 오천원을 내고
먹기에는 미안할 정도의 이십여 가지 음식들이 상에 가득
오른다. 첫 손님으로
우리를 받은 주인은 우리에게 가면서 먹으라고 노릇하게 구워진
누룽지를
봉지에 가득 담아 주엇다. 요즈음 세상에 아무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인심은
아니었다. 맛은 물론 가격과 인심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전라도의
식당에선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구강포의 청자박물관
수인관에서 포만감으로 그득한 배를 두드리며 나와 23번 도로를 타고 강진만
따라 내려갔다. 강진만은 동쪽 장흥에서 흘러온 탐진강을 비롯한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고 하여 구강포라고도 불린다.


*위 사진 : 강진만(구강포)의 풍경

   강진읍을 지나 고금도가 건너다보이는 바닷가 마량까지, 강진만 동쪽 가장
   자리를 따라
내려가는 23번 국도는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아름
   다운 길이다.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잔잔한 바닷물 너머로 건너편 도암면의
   육지가 섬처럼 가뭇가뭇 이어지고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동그란 섬이
   상록수에 덮여 점점이 떠 있다. 너무 허전하게
트이지도 않고 또 답답하게
   막아선 것도 없는 만 안의 바다는 오래오래 손때 묻어 정든
살림살이처럼
   오붓하고 정답다. 물이 빠지면 갯벌에 게나 망둥이가 발발 기다가 서다가
한다.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전남』중에서 -


강진군 대구면은 고려 시대의 관요가 있던 곳으로 무려 180여 군데의 가마터가
있던
우리나라 고려청자 생산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자기의 생산에 필요한 질
좋은 흙과
땔감용 나무 그리고 제품 운반을 위한 뱃길이 편리하여 청자의
생산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올 여름 충남 태안 앞바다 속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에서 다량의
고려청자가 발견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12세기 중반 전남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를 싣고 가다
침몰한 것이다.

천관산행으로 바쁜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잠시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있는
강진청자 박물관을 들러보기로 했다. 박물관에는 청자를 굽던 가마의 모형과
다양한 모양의 청자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고려청자는 실로 대단한 성취였습니다. 세계도자사에서 도기가 아니라 자기의
   역사를
이야기할 적에 17세기 이전에 자기를 만들어 쓴 나라는 중국하고 우리
   나라 밖에 없습
니다. (중략) 청자의 원산지가 중국이었다고 해서 고려청자의
   위상이 위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유럽의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났다고 해서 독일과 네델란드
의 르네상스가 빛을 잃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부끄러운 쪽은 그런 위대한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다른 주변
   국들일 것입니다.

                           
-유홍준, 윤용이, 『알기 쉬운 한국도자사』중에서 -


"하얀 망아지의 혼"이 서린 천관산

천관산은 장흥의 관산읍과 대덕읍의 경계 지역에 솟아있다. 우리는 남쪽의
대덕 방향에서 천관산문학공원과 탑신사를 지나 오르는 경로를 잡았다.
천관산 정상으로 오르는 최단코스 라고 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천관산을 두고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고 평하였지만 천관산은 오르기에 그다지 힘든 산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 산행에 나선 딸아이조차도 오를만한
곳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산을 오르는 도중에 잠시 약한 소나기가 쏟아져 바위 아래로 피신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하늘이 맑게 개어 오히려 더 쾌적한 느낌의 산행을 만들어주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오후의 햇살을 담은 다도해의 바다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휩쓸리며 흰색의 파도로
출렁거리는 억새의 무리가
조밀해져갔다.

특히 연대봉에서 환희대에 이르는 능선길은 “달빛보다 희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은” 억새들이 절정을 이룬 길이었다.
억새가 ‘빛의 자식’ 이라는 말은 그
능선길을 걸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햇빛을 머금은 억새는
눈부시게 하얬다.  그 너머로 생선비늘처럼 빛나는 바다도 억새를 닮아 있었다.



회진포구와 이청준 생가
산을 내려와 회진포구로 향했다. 회진포구에서는 시인 곽재구의 『포구기행』에
나오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팥죽집’에 들려 팥죽을 먹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구의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도 책속의 사진과 같은 김준임씨의
팥죽집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못 찾은 것일 뿐 그 찻집은 글 속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어느 골목엔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단념을 했다. 그리고 곽재구의
글을 잠시 읽어보는 것으로 상상 속의
팥죽을 먹었다.

  
다 떨어진 양철지붕에 비닐로 군데군데 비 가림을 한 허름한 이 팥죽집에
   우연히라도
들른 여행자라면 그는 지극히 큰 행운을 잡은 사람이다. 식탁에
   앉은 지 십 분만에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팥죽맛을 보게 될 것으므로.
  
그 자리에서 밀 반죽을 하고 통팥을 간 팥죽맛은 지극히 순했다. 주인이야
   인사치레로
소금과 설탕을 가미할 것을 권했지만 곡우 전 찻이파리의 맛
   보다 더 담백한 팥죽
그대로의 맛을 나는 천천히 즐겼다.
그리고 반찬.
   2천 원짜리 팥죽 한 그릇에 따라나오는 밑반찬의 가짓수가 여섯.
게장,
   갈치창젖, 반지락젓 무침, 고구마순 무침, 열무물김치, 김치. (......)
  
반지락젖 무침과 고구마순 무침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같은 종류의 찬
   중에서
가장 깊고 우아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게장과 열무 물김치의 시원한
   맛 또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위 사진 : 진목리 가는 길에 있는 영화 『천년학』의 세트장

회진포구에서 소설가 이청준의 생가가 있는 진목리로 가는 길가에 임권택
감독의 백 번째 기념 영화였던 『천년학』의 세트장이 있다.
내용보다 그 화면의 아름다움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

『천년학』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나그네」를 영화화 한 것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뒤에 한동안 이청준의 소설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다.
수많은 그의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단 하나만 꼽으라면 (물론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겠지만), 나는 단편 「눈길」을 꼽을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단순하다.
도시에서 공부를 하다 잠시 집에 다니러 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가세가 기울어
이미 남에게
팔아넘긴 옛집에서 마지막 하룻밤의 잠자리와 더운 음식을 만들어
준다. 아들에겐 그런 사정을 일체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뒷날 새벽
아직 어두운
시오 리 눈길을 걸어 장터 차부에서 아들을 보낼 때까지 어머니는 평상시와 다름
없는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아무 거처할 곳도
없어져버린 마을로
홀로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눈길 위에 찍힌 아들의 발자국을 보며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린다. 소설을 읽으며  눈이 시려왔다. 생전의 내 어머니가 그랬고 이
땅 누구의 어머니도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딛어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고 복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을 빌고 왔제......
                                                         
-「눈길」중에서-

 


*위 사진 : 진목리에 있는 소설가 이청준의 생가

회진에서 진목리 가는 길은 그러니까 소설 속 어머니가 걸어간 길이다. 이청준의
생가에 들려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또한 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고향을
다녀가는 어린 아들에게 옛집의 분위기 속에 자고가게 해주고 싶어, 새 주인에게
양해를 얻어 매일 같이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며 안방 한쪽에다 이불 한 채와
옷궤
하나까지 예대로 그냥 놔두었던 어머니...

미리 연락이 있었던 진목리의 이장님은 해가 저문 들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내게 전화로 나중에 불을 넣어줄 터이니 이청준 생가에서
자고 가라는 호의적인
제안을 했다. 내일 아침 식사는 자신의 집에서 하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내일의 일정을 위해 돌아서
나와야 했다.


장흥의 음식 명가, 취락식당
진목마을에서 장흥읍내까지는 사오십 분이 걸리는 제법 먼 거리였다.
장흥 읍내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니 “취락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러 장흥읍내로
갔다. 남도의 여행은
음식이 일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위 사진 : 취락식당의 키조개구이

“취락식당”은 키조개로스로 유명한 식당이다. 조리법은 간단했다. 장흥에서
동남쪽으로 사십 리 정도 떨어져있는 수문리 바다에서 나는 키조개와 한우
등심을 돌판에서 구워 함께
먹는 것이다. 별로 어울려 보이지 않고 평범해
보이는 이 두 가지가 뜻밖에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아내는 다른 여타의 지방에서 나는 키조개에 비해 장흥의 키조개에는
달착지근하고 구수한 맛이 강하다고 했다. 나는 이 식당의 키조개 구이의 맛은
인정했지만 ‘남도음식 별미집’이라는 타이틀은 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취락식당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조리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도 키조개와 등심을 사다가 구우면
같은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리법이 간단해서 같은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주변에 많겠네요?”
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많은 지는 모르겄지만 많이들 이 음식을 배우러 와요.”
“그러면 가르쳐 주십니까?”
“그라문 배우러 오는디 어쩔 것이요. 가르쳐 주어야제.”
“식당에 손해가 날 수도 있잖아요?”
“기실 가르쳐 줄 것도 없어요라우. 그냥 싱싱하고 질 좋은 재료를 사오는 것이제.”

취락식당이 ‘별미집’이 된 것은 주인인 지켜온 가장 기본적이고 평범한 원칙에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한 원칙을 망각하고 특별한 ‘노하우’에 집착했던 나의 생각이
별안간 머쓱해지는 느낌이었다.


남도 인심의 민박, 대나무집
이 날 잠은 장흥읍의 외곽 억불산 아래에 위치한 평화리 상선약수마을에서 민박을
했다. 대나무집이라는 별명이 붙어진 고병설씨의 집 독채를 믿기지 않는 가격
2만원에 빌린 것이다. 고병설씨는 읍내에 별도의 집을 마련하여 살고 있었다.

주인의 친절과 서비스는 특급호텔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찐 고구마와
귤을 ‘웰컴 후르츠’로 준비를 해두었고 냉장고 안의 달걀은 마음대로 요리를
해 먹으라고 했다. 부엌에는 일체의 주방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달걀은
주인장이 집 앞에 마련한 넓은 양계장
에서 전통의 방식으로 키운 닭들이 낳은
것으로 싱싱한 유정란이었다. 나중에 후라이를 한
아내는 노른자의 점도가
매우 높아 잘 풀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주인은 게다가 내가 소주
사오는 것을
잊었다고 하자 소주까지 내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소주와 달걀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자 한사코 거절하여 애를 먹기도 했다.


*위 사진 : 장흥 평화리의 대나무집

이 집의 유일한 흠은(?) 뒷날 새벽 양계장에서 울어대는 닭울음소리였다.
집과 양계장과의
거리가 작은 마당 하나를 사이에 둔 것으로 우리는 새벽을
알리는 닭들의 목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에 아침잠을 설쳐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닭들을 향해 “이놈의 시키들. 확
백숙을 만들어 먹을라.” 하고 엄포를
놓았더니 반항이라도 하듯 한 놈이 예의 그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한 방 더
날리는 통에 딸아이와 웃고 말았다. 닭장 안에는 덩치와 발목의 굵기가 남다른
토종 장닭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또한 오래간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대나무집은 이름 그대로 대나무숲에 둘러쌓인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위 사진 : 대나무숲


*위 사진 : 목백일홍길


*위 사진 : 메타세콰이어길

아침에 일어나면 전화를 한번 달라던 말이 생각나 전화를 하니 고병설씨는 금방
차를 몰고 왔다. 그가 온 이유는 마을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상선약수마을은
마을 진입로의 메타세콰이어
길을 비롯하여 연못가에 목백일홍 군락지가 있고
대나무숲이 우거진 나무의 마을이었다.
거기에 세심한 주인의 친절은 여행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에 대한 평가마저 달리하게 했다. 섣불리 세상살이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며 살 일이 아니다.

그로부터 메타세콰이어가 흔히 외래종으로 오인하지만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살아온
토종나무라는 것을, 목백일홍이 간질이면 나뭇잎을 흔들어 간지름나무
라고도 부르며 표피가
미끄러워 아이들이 오르다가 다칠까 집안에는 심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을 들었다. 재미있고 유익했다.


막걸리 식초의 맛, 바다하우스


이 날 ‘아점’은 차로 이십여 분을 달려 수문리 바닷가의 ‘바다하우스’에서 바지락회를
먹었다. 이집 또한 도지정 ‘별미집’이었다. 직접 막걸리로 만든 식초와 고추장을
쓰는 것이 맛의 비결이라고 한다. 새콤한 바지락무침에 밥을 비벼 먹는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했다.

그리고 바닷가를 따라 달렸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소설가 한승원의 작업실인
“해산토굴”엗 들려보았을 것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행 중에 느끼는 ‘시간이
좀 더
있다면...’이라는 미련이 유난히 이번 여행에는 많다. 이곳이 남도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 내가 당분간 외국에서 생활을 시작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국토를 떠나며

*위 사진 : 장흥의 바닷가

장흥 바닷가의 시비에서 읽은 한승원의 시가 각별하게 읽힌다.
아내와 내가 떠돌아  다녔던, 혹은 아직 발걸음을 하지 못한 국토의 곳곳에,
잘 알고 지냈던 사람들 에게,
혹은 잠시 지나치거나 인상을 쓰고 싸웠던 사람
들에게, 아니면 그런 만남의 인연도 없이 그냥
같은 하늘 아래 살아오고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나만의 이별사로 대신한다.

우리 서로 “먼지알 같은 들꽃들의 사랑”으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면서.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너는 발 빠른 분침으로
  
나는 발 느린 시침으로
  
한 시간마다 뜨겁게 만나자
  
순간을 사랑하는 숨결로 영원을 직조해내는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먼지알 같은 들꽃들의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그리고 우리 
  
한 천년의 강물이 흘러간 뒤에
  
열두 점 머리 한가운데서 
  
너와 나 얼싸안고 숨을 멈추어버린
  
그 시계
  
다음 생에는 우리 
   이 세상 한복판에서 너의

  
영원을 함께 부둥켜안은 미이라가 되자
  
박새들의 아프고 슬픈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한승원의 시, 「시계」-

(2007)

*이 여행을 하고 나서 아내와 나는 회사일로 미국에 주재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이어지는 생활과  여행도 매력적이고 나쁘진 않지만, 걸핏하면
마음 한구석 숨어있던 내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툭툭 튀어나온다.
아내와 땀흘리며 오르내렸던 산길과 북적이는 거리,
퇴근길의 삼겹살과 소주, 집앞 골목의 분식집과 제과점과 복덕방과  
안경점과 편의점과 음식점과 학원 등이 이어지는 풍경... 
가까운 날에 다시 그런 소소한 일상과 대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장흥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오기 전 여수로 가서 이 블로그가 아닌 원래의 나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준 정병우선생님과 그의 가족을 만났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만나 키운 인연이었다.
나의 미국행으로 잠시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 속에 술을 나누면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미국에서 나는 느닷없는 그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그것이 마지막 자리인 줄 누가 알 수 있었으랴.
그를 애도하며 지난 국토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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