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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 49 - 경북 영양

by 장돌뱅이. 2013. 5. 25.

조지훈의 ‘지조’ 그리고 영양 고추

봉화를 지나 31번 국도를 타고 일월산을 넘어 영양으로 가기로 했다.
산은 걸어야 제 맛이 나는 법이어서 일월산도 발로 올라보아야 할 곳
이지만 이번에는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주곡리의 주실마을 때문에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일월산을 우회 하는 방법도 생각해보았지만 시간 관계상 이번
여행에서는 지나치기로 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여행이란 어차피 존재
하지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가지 않은 길은 아내와 내게 아직 꿈이 남아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시 한 편을 읽어보는 것으로 짧은 여정
때문에 비껴가야 하는 조지훈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 본다.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 //
   주렴 밖에 성긴 별이 / 하나 둘 스러지고 //
   귀촉도 울음 뒤에 / 머언 산이 다가서다 .//
   촛불을 꺼야 하리 / 꽃이 지는데 //
   꽃 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
   하이얀 미닫이가 / 우련 붉어라. //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하노니 //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
             - 조지훈의 시,「낙화」-

시에서 읽혀지는 시인의 마음이 맑고 곱다.
일제 강점기인 젊은 시절 등단하여 한국적이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시인은 이후 학자로서 한국문화사에 깊이 천착하여
『한국문화사서설』,『한국민족운동사』등의 저술을 남겼다.

1960년에 발표한「지조론(志操論)」이란 글을 통하여 조지훈은
친일파들의 뉘우침 없는 행동과 자유당 말기의 부패한 사회지도층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부정한 세태에 흔들리지 않는 지조
있는 선비였다. 그에게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 이었던 것이다. 고려대학교 재직 시절에는 당시의 서슬 푸른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하며 늘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봉화군과 경계를 이루는 일월산은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달리면서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에 이어 높이 1228미터의 봉우리로 우뚝 세운
큰 산으로 둘레가 백리에 이른다. 때문에 차를 이용하여도 산마루
가까이 있는 봉화터널과 영양터널까지 오르거나 다시 내려오는데
만만찮은 시간이 걸린다. 어느 방향에서 영양으로 들어가건 긴 여정을
감수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예부터 ‘육지 속의 섬’으로 불렀겠는가.

일월산의 산줄기는 영양군의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면서 군을
해발 600 -700미터의 경북 최고의 고원지대 위에 올려놓았다.
때문에 영양군 북쪽의 수비면, 일월면, 청기면 등은 가을에 첫
서리가 일찍 내리고 봄 늦게까지 이어진다. 영양은 일조시간이
많고 일교차가 큰 기후에 고추재배에 적합한 토질을 갖추고 있어
영양 고추는 이름이 높은 특산물이 되어 있다. 껍질이 두꺼워
빻으면 가루가 많고 적당한 매운 맛에 당도가 높아 시장에서
영양고추는 다른 지역에서 난 것보다 높은 가격으로 팔린다고 한다.
고추 수확이 시작되는 팔월 초순이면 영양의 산천이 붉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일월산을 내려와 잠시 쉬다가 우연히 보게 된 길옆
배수로의 뚜껑에도 고추 모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달빛이 잠긴 호수와 같은 집, 사월종택(沙月宗宅)

영양읍에서 영덕으로 이어지는 918번 지방도로변에 사월종택이 있다.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있는 사월종택은 풍수를 모르는 아내와 나의 눈에도
집의 앉음새와 주변 환경과의 어울림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월종택이
자리 잡은 방향은 정남향으로 이는 궁궐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만이
갖을 수 있는 방위로 개인주택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한다고 한다.

담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막돌을 쌓은 기단과 그 위에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눈에 들어오고 그 오른 쪽으로 안채와 연결된 사랑채가
우뚝하다. 안채에 사람이 살고 있는 듯 문이 잠겨 있어 집의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마당에서 서성이며 보는 안채와 사랑채에는 시원스러우면서도
단정한 맛이 있었다.

월담헌(月潭軒)이라는 사랑채의 이름이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종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어진 숙운정(宿雲亭)이라는 정자의 이름
또한 그랬다. 종택과 정자를 지은 사월 조임(沙月 趙任, 1573-1643)은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적에 19세의 나이로 형과
함께 곽재우 의병대장의 진영에 들어가 활약하기도 했다.


31번 국도를 따라
사월종택에서 다시 영양 읍내로 나와 31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다 읍내를 벗어나기 전 왼편으로 보면 현1리로 들어가는 시멘트
포장길이 나온다. 영양에서는 드물게 평지를 이루는 곳인데 그곳에
한 쪽만 남은 당간지주와 자그마한 삼층석탑 한 기가 있다. 이 둘
때문에 이곳에 오라고 한다면 좀 불만이 있겠지만 지나는 길이니 굳이
피해갈 이유가 없다.주변은 온통 평평하게 너른 밭이어서 시야도 편안하다.

당간지주에서 개울 건너편을 언덕 위를 보면 모전석탑(현2동 모전
오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점판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쌓아 올린
탑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그 크기가 자못 거대하나 탑의 꼭대기
상륜부를 비롯하여 곳곳에 새로 만들어 끼운 석재들이 생경하여
차분한 맛이 부족하다.

모든 문화는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전통과 자연환경에 따라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모전석탑은 불교문화가 우리나라로 전파되면서
생겨난 우리만의 특이한 양식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유래된 탑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은 풍부한 흙을 이용하여
벽돌로 많은 탑을 쌓았고, 질 좋은 화강암이 풍부한 우리나라는
벽돌을 굽는 대신에 석탑을 발전시켰다. 흙이나 석재가 부족하였던
일본은 주로 나무로 탑을 만들어 ‘목탑의 나라’가 되었다.

모전석탑은 전탑이 석탑으로 변화해가는 과도적인 양식이다.
즉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는 것이다. 그 첫 보기는
경주 분황사 석탑이다. 현2동 모전 오층석탑도 같은 양식이다.
자르기 쉬운 안산암이나 수성암이 소재로 쓰인다고 한다.

같은 모전석탑이라도 의성의 탑리 오층석탑처럼 돌을 크게 하고 구조를
단순화 하여 마치 전형적인 석탑에 가까운 모습을 한 것도 있다.

31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일월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길게
흘러내려오는 반변천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게 된다. 물과 길이 함께
굽이치며 흐른다. 물이 있고 산이 있는 풍경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남이포(南怡浦)에 이르면 일월산 서쪽에서 발원한 청계천과
합수되면서 물길이 더욱 커진다. 풍경 또한 극적인 변신으로 반변천
최고의 경승을 만들어낸다.

깎아세운 듯한 석벽 좌우로 물이 흐르고 건너편엔 촛대처럼 뾰족한
바위(선바위 立岩)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근래에 지어진 정자도
풍경에 거스르지 않고 잘 어울려 보인다.

조선시대 장수였던 남이 장군은 남이포 근처에 살던 용의 아들,
아룡과 자룡이 역모를 일으키자 그들을 평정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일전 끝에 용을 물리친 장군은 다시 역모의 무리들이 생겨날 것을
경계하여 지형을 바꾸기 위해 칼을 내리쳐 산을 잘랐는데그때 갈라진
것이 선바위라고 한다. 역사 속에서 역모를 꾀했다는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남이 장군에게 사람들은 역모를 진압하는 전설을 만들어 위로를
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은둔한 선비가 세상을 즐기는 법, 서석지(瑞石池)
남이포에서 911번 지방도로를 타고 서북쪽으로 향하면 보길도의 부용정,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서석지가 있는
연당마을에 닿게 된다. 차에서 내리자 깔끔하게 정리된 흙길과 야트막한
흙담이 만드는 고샅길이 눈에 들어왔다. 황토의 질감이 포근하고 따뜻해 보였다.

서석지는 1613년에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이 집을 건립하고 만든 연못이다.
그는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이곳 자양산 기슭으로 들어와 은둔하였다.
연못가에는 서재인 주일재(柱一齋)와 정자인 경정(敬亭)이 자리잡고 있다.
서재 앞에는 네모난 공간을 만들어 선비들의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등을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이름 붙였다.

연못 안에는 연꽃과 선유석, 통진교, 희접암, 어상석, 낙성석, 등으로
이름 붙여진 다양한 모양의 ‘서석(瑞石)’이 있다. 이 서석들은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라 한다.
연못 주위에는 대나무와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은행나무의 수령이
몇백 년이나 된 듯가지와 잎이 무성했다. 가을에 영양을 여행을 한다면
반드시 서석지를 찾아 연못에 비친 푸른 하늘과 노란 은행나무의 장관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도 아름다운 봉감 모전오층석탑(鳳甘 模塼五層石塔)
십여 년 전 울산에 살 적에 청송을 경유하여 봉감 모전오층석탑을 보러 온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시대와 지역에 따른 석탑의 다양한 모양에 관심이 있어서 만나는 탑마다
사진으로 담아두곤 했었는데, 자료에서 본 영양 봉감마을의 모전오층석탑이 여간
늠름하게 잘 생긴 것이 아니어서 꼭 현장에서 실물을 보고 싶었다.
여행 직전 나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자동필름 카메라 대신에 ‘거금’을 들여 렌즈 교환식
카메라를 몇 가지 렌즈와 함께 구입하였다.
그리고 첫 출사를 이 탑이 있는 영양군 입암면 신해리로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직 셔터를 열 번도 누르지 않은 새 카메라가 박살이 나는
끔직한 ‘참사’가 일어났다. 공터에 차를 세우고 얼른 탑 쪽으로 가려고 카메라
가방을 들쳐 매는 순간, 긴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가 가방에서 빠져나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더니 콘크리트 포장길에 곤두박질 친 것이다.
덤벙거리는 나의 성격이 카메라가방의 고리를 잠그지 않아 비롯된 일이었다.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 났다.

세상에! 나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입을 벌린 채 아내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세심한 아내는 큰 일 앞에는 쉽게 대범해 지곤 한다. 아내는 순발력
있게 수습 단계로 들어갔다.
“잊어버려 기왕 그렇게 된 거...액땜했다고 생각해. 울산으로 돌아가면
똑같은 걸로 다시 또 사지 뭐.”
내 자신을 제외하곤 화를 낼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억울하게 했다.
나는 말없이 우뚝한 석탑에게 터무니없는 원망을 퍼부으면서 여분으로
가지고 간 자동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 다시 영양행을 계획하면서 아내와 나는 그때 일을 다시 돌이켜
보았지만 그래도 영양에서 딱 한 가지만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봉감 모전오층석탑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보았지만 석탑의 감동적인 모습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카메라의
아쉬움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아내와 나의 머릿속에 깊고 또렷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통일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에 지어졌다는 국보 제 187호의 모전석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함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있었다. 탑을 휘돌아 흐르는
강물과 건너편에 병풍처럼 막아선 그림 같은 풍경도 여전히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꺼내어 손에 꽉 쥔 채로 무사히(?) 사진을 찍었다.
탑은 부처님의 혼이 깃든 집이다. 당연히 집도, 그 집이 위치한 장소도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봉감마을의 모전오층석탑은 그 모범이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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