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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여름 휴가 5 - 영화 "화려한 휴가"

by 장돌뱅이. 2013. 5. 9.

 
*위 사진 : "화려한 휴가" 홈페이지에서 인용

디워에 이어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에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역시 휴가이기에 가능한.

몇 해 전 영화 “꽃잎”과 “박하사탕”에, 그리고 TV드라마 “모래시계”에 ‘오월광주’가
나온 적이 있다. 그보다 앞선 80년대 후반 영화운동을 주도하던 독립영화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영화 “오! 꿈의 나라”에서도 광주민중항쟁을 다루었다.
그러나 “꽃잎”과 “박하사탕”이 광주가 남긴 상처의 후유증을 이야기하고,
“오 꿈의 나라”가 이 땅에 진주한 미군의 의미를 묻는 영화였다면
“화려한 휴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의 현장을 정면으로 다룬다. 

젊은이들의 풋풋한 사랑과 형제의 다정한 웃음소리가 가득하던 평화로운 광주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인들의 잔인한 살육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피투성이로 나뒹군다. 광주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한다.
평범했던 택시운전수는 군인들의 총격으로 동생을 잃자 총을 들고 시민군에 가담한다.
그리고 도청의 마지막을 지키다 쓰러진다. 


*위 사진 :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발행 자료집 중에서(이하 동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 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웃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자유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김남주의 시 중에서 - 

80년 광주를 되살린 대형 셋트장에서 촬영된 영화는 이제까지의 다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실감나게 광주의 모습을 드러냈다. 처절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객석에선 탄식과 비명이 섞여 나왔다. 애국가를 틀면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가하는 장면은 섬뜩했다(이는 당시 실제로 일어났던 참극이었다). 담담하게 최후의 순간을
각오하는 시민군들의 모습에선 나 역시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객 중에 젊은이들이 많았다. 동행했던 딸아이가 자기들 세대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오월광주’ 역시 지난 역사적 사실일 뿐이라고 했다.
영화를 보고나자  딸아이와 그 세대를 위해서라도  “화려한 휴가”가
좀 더 치밀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서 평면적이고 밋밋한 스토리의 전개가 아쉽다.
실감나는 전투장면 이외에 그해 광주를 통하여 오늘을 돌아볼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냈어야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더러 아직도 모르거나 긍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놀라울 때도 있지만)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라는 절규만으로는
좀 부족해 보였다.

“민중 스스로 역사의 전면에 자신의 온 생애를 던지는 아름다움” 보여주며 항쟁의
정점을 이룬  운전기사들의 시위나 공수부대가 퇴각 이후 5일 동안 지속되었던  
‘해방광주’의 아름다운 평화에 대한 누락도 아쉬웠다.
부당한 국가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났지만 광주는 시민들의 자율에 의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공동체적인 결속을 이루어냈다.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피로 맺어진 나눔의
연대감이 도시 전체에 흘러 넘쳤다. 잠시 보았던 그 아름다운 세상이야말로 광주
본연의 모습이자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 아닌가.
 


*위 사진 : 우리를 광주 '알리바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던 아이의 맑은 눈빛.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우리를 잊지 말라”고 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온 한 밤 중

아내와 나는 오래간만에 노랗게 빛바랜 광주의 옛 사진첩과 책을 꺼내 보았다.
오월광주를 있게 한 70년대의 유신정권과 그의 잔당들인 신군부에게, 아직도 거리를
횡보하고 신문과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미는 그 하수인들에게, 그들이 피를 딛고 누린
부귀영화의 세월에, 그 추악한 권력과 뉘우침 없는 뻔뻔함에게  저주를 보낸다.
아내와 광주 망월동을 다녀온 몇 해 전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적이 있다.

    피를 부른 이들이 사죄를 하지 않았고 그 부당한 권력을 찬양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뉘우친 적도 없는데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앞질러 이야기했다. 사태의 전말과
   책임자들이 명확히 규명되지도 않았는데 묘지는 성역화되고 배상은 이루어졌다.
   곪은 상처를 껍데기만 서둘러 봉합해버린 우리의 서툰 바느질에 역사는 무엇으로
   응답해줄 것인가.
                             -장돌뱅이,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중에서 -

(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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