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아침 7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뇌세포는 자의반 타의반 쉴 새 없이 가동되었다.
오후가 되도록 이어지는 각기 다른 형태의 마라톤 회의, 의논과 결정과 선택은 끝도
없이 나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정신 차리라고 윽박 질러대는 듯했다. 조금씩 머리에서
쥐가 났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깜빡깜빡 잊어버렸다. 마지막 회의가 끝나자 나의
정신력은 커다란 돌덩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입안이 바싹 타오르고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지적 능력은 마지막까지 소멸된 상태다.
자리를 박차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찬 물로 얼굴 주변을 두드린 후 큰 호흡을 내쉬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어느 새 눈 밑은 거무죽죽해져 있고 나도 모르게
눈가에 주름 몇 개가 더 잡혀 있는 것이 보인다. 마흔도 중반을 넘어선 나이. 그래
인정하자. 많이 힘든 모양이구나.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마치 딴 여자 보듯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행? 혼자? 그 나이에? 왜?”
출퇴근이나 사업계획서가 없는, 경제성 제로의 비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사람
앞에서 속으로야 ‘앞으로 어떻게 살 건데?’ 라는 다소 철학적이고 냉소적인 문장이
생각났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여과된 표현방식의 하나로 이 질문을
택했을 것이다.
“자유롭고 싶어서.”
더 이상 질문이 나올 수 없는 대답을 생각한 끝에 내뱉은 이 한마디. 말해놓고도 민망
했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혼자 심오하고 심각해지는 것처럼 쑥스러운 일은 없다.
자유롭게 사는 게 어떤 걸까. 내가 열망하는 자유는 어쩌면 사치스럽고 한심하기
그지없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말 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을 하지 않고, 걷고 싶으면
걷고, 책 일고 싶으면 책 읽고, 울고 싶으면 울고, 운전하고 싶으면 운전하고, 일 하고
싶을 때 일 하고.
나는 간단한 자유 영역부터 실험하고 싶었다.(그러나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상적인 자유마저도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 여행에서는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도 만나지 않을 것이고 ‘론니플래닛’의 미국편을 들춰보지 않을 것이며 20년 동안 만나
지 못했던 먼 사촌들에게도 절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글을 쓴다든가 사진을
찍는 등의 기록적인 행위도 가급적 삼갈 것이고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지명 외에는 머릿
속에 불필요한 영어 단어를 입력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일상적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여행의 이름을 내식대로 하나 정했다.
‘머무는 여행’
책 속의 원문 그대로를 단지 좀 발췌하여 줄여본 것이다.
그렇게 김영주는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얼굴 위로 분다. 물에 젖은 맨발을 시트 위에 올려놓고 몸을 뒤로 눕히면서
해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눈에 덮인 나무들이 스쳐가고 하늘이 흘러간다. 작게
틀어놓은 음악의 볼륨을 올렸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 행복하다.
그녀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고 또 다시 떠났다.
돌아오는 LA 공항에선 또 이렇게 적었다.
당분간 내 인생을 유쾌하게 만들어 줄 ‘시간의 점’을 두둑이 챙겨 온 것이다. 그들은
저 깊은 보물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가 자신이 역할이 필요해질 때 적절히 튀어나와
나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며 내 등을 두드려 줄 것이다.
슬프다고 느낄 때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하라고. 지치고 힘에 겨울 때 슬쩍 내 어깨에
기대라고. 비워졌다고 느낄 때 채워가라고. 그래서 인생은 늘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잊지 말라고.
나는 그녀가 지나간 여정을 캘리포니아 지도책 속에 메모하여 두었다.
머지 않는 날 나와 아내도 같은 길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올 것이라 다짐하면서.
바다를 끼고 달리는 태평양하이웨이의 눈부신 햇살과 푸른 바다를 상상하면서.
(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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