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말 교리 공부를 하고 있는 성당의
'훈련병' 신자반에서 1박2일로 피정(避靜)을 다녀왔다.
피정?
생소한 단어였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요하고 정숙한 곳으로 옮겨감'을 말하는데
성당에서는 '조용한 곳에서 행하는 종교적 수련'을 의미하는 듯 했다.
한자는 해석이 어렵고 재미있다.
일테면 피서(避暑)는 더위'로' 피해가는 것이 아니고
더위로'부터' 피해가는 것이지 않는가.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글을
'정신을 집중하면 못 이룰 일이 있겠는가' 대신에
'정신을 집중해도 어떤 일도 안된다' 라고 해석하면
어법상 어색하긴 하지만 문법적으로는 어디가 틀리는지
모르겠다고 하던 학창 시절의 장난스런 의문을 나는 여전히 갖고 있다.^^
아무튼 피정은 일테면 대학시절의 MT 같은 것이었다.
종교적 수련의 의미를 떠나서도
아내와 함께 피정이 즐거웠던 것은
그런 옛 분위기에 젖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 늦게까지 이어진 수녀님의 강의는
전래 초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천주교에 가해졌던 탄압과
그로 인한 순교의 역사에 집중되었다.
솔직히 순교는 내게 다다를 수 없는 '신의 경지' 로 느껴져
전율하면서도 쉽게 가까이 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탄압을 피해 산 속으로 피해간 교인들 중에서
(그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굶어죽은 사람은 없었다는
- 그 이유가 철저한 나눔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 생활에 있었다는,
수녀님의 말씀은 감동스런 ''인간의 역사'로 다가왔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평소에는 잘 입에 올리지 않던 나라살림살이를 걱정해보기도 하고
날마다 새롭게 불거져 나오는 낯선 정치경제적 단어들의 의미를
고민해보기도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비고 출근을 하고 해 저무는 저녁이면 흔들리는 차 속에
몸을 싣고 퇴근을 하며 살아온 무지랭이로서는
한두 달 뒤의 세상조차 만만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국가가 하는 일이란 게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합법적으로' 돈을 거두어
부유한 사람들에게 몰아주는 것 아니겠냐는 냉소가
그럴 듯 하게 와닿기도 한다.
나눔...
경제적인 용어는 아니겠지만
인간다운 삶을 위해 세상이 고민해야 할 일은
더 많은 생산과 소비와 시장과 경쟁이 아니라
결국 나눔뿐일 것이다.
몇 개의 빵으로도 오천명이 먹을 수 있었다는 성경의 기적이
'슈퍼 킹왕짱'으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찬양과 과시가 아니라
이 땅의 초기 천주교 역사에서 보듯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혹은 만들어내야 할)
나눔의 위대함과 지혜로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믿음이 제대로 서지 않은 예비신자 수준의 발상일런지......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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