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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고증식의『단절』

by 장돌뱅이. 2013. 6. 21.


시인 신경림이
"고증식의 시는  성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도 않고
거친 소리로 달려들지도 않는다. 자기만이 삶의 진실을 보고 있다는
허풍스러운 몸짓도 없다. 따듯한 눈으로 차분하게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곰곰히 그것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의 시" 라고 했다.

따뜻함과 조용함과 겸손함,
그리고 여리고 겸허함이
그의 시 속에서 맑고 투명한 햇살처럼 빛난다.

숱한 다짐을 해보지만
그처럼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때문에
혹은 세상 때문에.
그래도 그의 시를 읽으며 다시 꿈을 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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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저 들에 낟알 여무는 소리 들리고
   내 입엔 밥이 들어오고
   하루 해는 산마루를 넘는다

   내가 넋놓고 있는 동안에도
   누구는 나를 선생이라 불러주고
   가난한 식솔들은 저마다 불을 밝혀
   서로의 체온을 나눠갖는다

   사람아
   가을비에 젖는
   작고 여린 것들아
   나 그냥 이렇게 앉아 있는데
                        -「고마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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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처럼 엎드린
   누런 소 곁에

   흰 깃발로 꽂혀 있는
   눈부신 백로 한 쌍

   잦아드는 햇살 아래
   무심한 눈길 나누는
   저 평화로운 공존
                       -「저물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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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다

   늘 지나치던 저 겨울 숲도
   훨씬 깊고 그윽하여
   양지바른 산허리
   낮은 무덤 속 주인들 나와
   도란도란 햇살 쪼이며 앉아 있고
   더러는 마을로 내려와
   낯익은 지붕들을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살아 있는 것만 빛나는 게 아니다

   가볍게 떠다니는 영혼들이
   햇살 속에서 탁탁
   해묵은 근심을 털어내고 있다.
                            -「기차를 타고」-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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