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족구를 처음 해본 것은 군입대 후 수용연대에서였다.
(요즈음도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수용연대는
입대를 한 장정들이 훈련소로 입소하기 전
간략한 절차를 거치기 위해 일주일 정도 머무르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신체검사 이외에는 크게 할 일이 없는 곳이라
낮에 이곳저곳으로 사역을 많이 나갔다.
어쩌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려간 곳이 특수부대의 모병 안내소였고
그곳에서 내게 주어진 일은 주변 청소였다. 사실 청소라는 것도
매일 하다보니 특별히 할 것도 없어 게으른 동작으로 한시간 정도 빗자루질을
하면 끝이 나게 되어 나머지 시간은 전적으로 그곳 기간병의 지시에 좌우되었다.
그곳 선임하사가 족구광이었다.
당시는 넷트를 치고 하는 족구가 아니라 양팀의 경계 지역에 폭 50센티미터 정도의
데드죤(일명 '똥통')을 그려서 그곳을 넘기며 공을 주고 받는 형태였다.
그는 머지 않아 족구가 올림픽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거라며
입대한지 하루 이틀밖에 안되어 '아직 사제물이 덜 빠진' 우리들을 번갈아
족구장으로 끌어내었다. 그가 즐겨하는 것은 일대일 족구였다.
그는 '짬밥의 관록'이 쌓아올린 현란한 발재간을 보여주었고,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별 필요하지도 않은 사역병을 매일 부르는 것에는
자신의 발재간을 과시하려는 이유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기면 그냥 그걸로 끝이지만, 지면 원산폭격이나 주먹쥐고
푸시엎을 해야하는 대단히 불공평한 규정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애매모호한 아웃과 쎄잎의 판정 권한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어 기술의 우위를 떠나서도 우리가 이길 확율은 거의 없는
경기였다. 실제로도 우리들 중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동기들이 훈련소로 들어간 뒤에 무슨 이유때문인지 나만
입소가 늦어져 열흘동안 수용연대에 있게되면서
점차 그와 대등한 경기를 벌일 수는 있었지만.
나중에 울산에서 공장생활을 하면서 불이 붙은 것이 족구였다.
점심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할 수 있는 경기로 족구가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서간의 대항은 자못 회사내의 큰 관심사가 될 정도여서 점심시간만 되면
우리는 '계급장을 떼고' 언쟁을 벌여가며 족구 경기에 열을 올리곤 했다.
안전화는 업무때문이 아닌 족구 때문에 더 많이 닳아갔다.
요즈음은 생활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 텔레비젼 중계까지 하는 족구.
80년대 공장 생활의 한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그 경기를
20년만에, 50을 넘긴 나이를 새삼 절감해가며, 즐겁게 해보았다.
(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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