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완간하며
이문열은 그가 "산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남기기 위해
"지금까지의 내 삶에 축적된 모든 직접. 간접의 경험,
모든 기억과 사유 중에서 문학적 소재 혹은 장치로 유효하고
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아낌없이 썼다."고 했다.
해서『변경』에는 명훈, 영희, 인철의 3남매의 시각을 통해서
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까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등장한다.
어떤 의미로건 한 시대를 풍미한 이야기꾼으로서
이문열의 뚝심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원동력으로 소설 곳곳에서 느껴진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감칠 맛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느낄 수 있었다면
『변경』에서는 삼 남매의 어머니를 통해 무뚝뚝하면서도 정감이 있는
경상도 사투리를 맛 볼 수 있기도 했다.
내가 부담스러운 것은 그의 시각이다.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난 이념과 전망, 진보 따위에 지극히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이문열의 시각이 드러난다.
일테면
"우리는 분열된 세계 제국의 변경인이다..(......)그런 변경에 제국이 가져올 것은 뻔하다.
그것이 변경의 확대를 위한 것이건, 유지를 위한 것이건, 제국이 가장 힘주어 그 원주민
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은 적대의 논리다. 결국 당신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늘날 아메리카와 소비에트로 표상되는 두 제국의 적대 논리 내지 그 변형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당신들이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다."
"당신들은 내 전망의 결여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성한 당신들의 전망을
걱정한다. 당신들은 내 무이념을 의심쩍어하지만 나는 또한 오히려 당신들의 이념 과잉이
못미덥다."
차라리 회의는 괜찮다.
그러나 냉소와 비아냥은 거북하다.
그것은 극복이나 초월의 의지가 아니라 열등감이기 때문이다.
'변경'이라는 제목부터 어딘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는, 혹은 중심부로 들어갈 수 없는
체념의 의미가 스며 있는 듯하다.
그것을 자기가 선 자리를 객관화 시켜보는 성숙한 시각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끈질기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그가 의미하는 '변경'은 공허한 관념에서 나온 잘못된 좌표일 뿐이다.
누구나 자신과 자신의 삶은 '중심'이자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의 냉소와 비아냥은 4.19혁명을 두고
'우연히 한 판 잘 맞아 떨어진 역사의 복권'이라고
말하는데서 절정을 이루는 느낌이다.
이문열은 한때 현실 정치와 관계를 맺으면서
'이념과 전망 과잉'의 돌출적인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나는 그가 작가라는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냉철한 사회적인 발언이
긴요했던 칠팔십 년대에는 '무이념의 순수'로 침묵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회적으로 강조되는 '순수'에 대한 예찬은 종종 가장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포장하려는 '이념적'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지난 역사에서 배우지 않았던가.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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