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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퍼온글) 오만한 과학, 돈에 눈 먼 민영화...

by 장돌뱅이. 2013. 7. 25.


초보적인 자연재해인 태풍이나 홍수에도 연례행사처럼 당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화산과 지진까지도 확실하게 대비하여 과학문명의 극치를 자랑해 왔다. 진도 7.9의
간토대지진(1923)은 9만9000여명, 한국인만도 2000~600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한국인 희생자는 정확한 통계도 피해 보상도 없었다. “조선인(또한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언론의 거짓
선동에 흥분한 일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죽창이나 몽둥이로 죽였다.
그 8년 뒤 ‘만주사변’을 일으킬 정도로 ‘대일본제국’은 건재했고,
이 비극은 일본에서  ‘방재(防災)의 날’로 남아있다.

72년 뒤 진도 7.3의 한신·아와지 대지진(1995)의 괴력은 6400여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불과 1년여 만에 복구했고, 이때 보여준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은 세계의 경탄을 자아냈다.
한신대지진 이후 16년 만의 동일본대지진은 충격이었지만 워낙 경이의 나라인지라
그 폐허를 금세 성형수술 해버릴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쓰나미가 닥쳤다.
그 참상을 담아낸 화면을 보노라면 누구라도 측은지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만다.
피해 지역이 어느 나라, 어떤 사상, 어떤 신앙이든, 아니 모든 생명체는 물론이고
도로나 집 같은 무생물체에까지도 처절한 연민이 솟구친다.

이런 정황에서 ‘하나님의 경고’니 ‘천벌’ 운운은 지진에 뒤지지 않는 충격이었다.
신앙이나 사상이 다른 대상의 불행도 ‘기회’로 받아들이는 이 견고한 배타주의가
하늘의 뜻인지는 모르지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정신이 통곡할 일이다.
정작 자연재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지진과 쓰나미만이었다면 이미 일본은 지금쯤 빈틈없는 복구의 발길로 세계인의
존경과 부러움을 사고 있을 것이다. 전전긍긍하며 세계인의 두통거리가 되고 있는 건
과학의 오만이 낳은 재해, 원자력 발전 시설 때문이다.

비극의 배경에는 돈만 된다면 뭐든 민영화하는 자본주의의 부패한 보수주의 정권,
문제의 원자력발전소조차도 민영화한 자민당의 과오가 깔려 있다. 생명과 자연의
안전보다 손익계산을 앞세우는 개발위주의 유일 신앙이 그 원죄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거기에다 댐 붕괴 걱정까지 덧붙겠지만, 하나 다행한
것은 아직 원자력 발전소는 민영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국민의 위기 속 질서의식,
그 조용함은 이제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부패한 자본주의적 기업윤리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핵융합의 산물, 일종의 체제 순응주의임을 깨달을 때가 되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숙명처럼 끈질기게 기다리는 그 조용함의 미덕은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을 한 번도
이룩해 본 적이 없는 국민적 체질이다. 세계 유일의 화석화된 천황제 자본주의의
토양에서 자라난 수동적 인간상의 상징이다.

그 의연함은 천황의 뜻이라면 남의 나라를 잔인무도하게 짓밟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변형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조선 점령’은 정당했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겨대는
의연함이기도 하다. 국민 다수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보수주의 정당 지지자들로
여전히 인간의 존엄성보다 사기업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사회체제에 동의하고
있다. 엄청난 인재를 당하고도 언론이나 지식인 등의 비판의 목소리가 크지 않은 건
내일의 일본은 물론이고 지구촌 전체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자연은 지구촌 모두의 삶의 터전으로 어느 모서리가 상처 나도 당장 우리의 삶이
상처를 입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의 비극을 치유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두 나라의 시민연대로 자연을 파괴하는 썩은 정치세력을 영원히 몰아내는 게 급선무이다.

*출처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글

(20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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