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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농업박물관

by 장돌뱅이. 2013. 7. 31.


*손문상 화백의 그림 편집


이랬다 
아버지가 논 갈고 알곡을 거뒀어도
자식은 아버지의 손은 놔두고 농구만 살폈다

또 이랬다
자식은 논물에 젖었던 아버지의 생애보다는
종자만 먼저 보살폈다

아버지는 여전히
워낭소리에 귀 기울이며
황소 고삐를 잡아당기는 농부지만
쟁기, 써레, 달구지를 바꿔달지 못하고
밀, 벼, 보리를 뿌리지 못하는 박제였다

들판을 얻어 살아간 이는 아버지였지만

들판을 버려 살아간 이는 자식이었다
자식의 자식들에게 보이기 위해 농구들을 진열하고
자식의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종자들을 보관하고
자식의 자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햇빛 아래 들일하던 아버지를 조명등 아래 전시하였다

늘 그랬다
산 아버지가 한 해 한번 손수 거둔 식량을 먹고 자랐던 자식은
죽은 아버지가 허울만 있는 대가로 한 달에 한번 월급을 받고
날마다 저녁이면 들녘에 안개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농업박물관 문을 잠그고 집에 돌아가
먼 나라에서 가져온 쌀밥과
먼 나라에서 가져온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하종오의 시, 「농업박물관」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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