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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이서방네 노을

by 장돌뱅이. 2013. 8. 5.

  

 

 

 

빨간내복님 집에서 식사는 늘 길다.
정확하게 말하면 식사와 식사를 하고 난 뒤의 뒤풀이가 길다.
매번 밤이 늦어서야 일어서게 된다.

빨간내복님 댁을 방문하기 전 아내는 내게 9시 전후에는 일어서야
한다고 강조를 했다. 즐거운 자리에만 가면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나의 버릇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내의 다짐은 지켜지지 못 했다.
기특하게도(?) 빨간내복님 댁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작동 이상으로
아내를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난 약속시간 지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빨간내복님 부부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하고
걱정을 할 뿐 나의 미필적 고의가 아닌 ‘의도적 고의’에 대해 그다지
탓을 하지 않았다. 아내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 할 만큼
즐거운 자리였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번은 빨간내복님댁 집들이 만남이었다.
두어 달 전 새 집으로 이사하고 이제 막 집 단장을 끝낸 참이라고 했다.  
새 집의 산뜻함에 감각적인 색상과 모양의 가구와 소품들이 더해져
마치 신혼집 분위기가 났다. 세련된 카페 같기도 했다.

지수맘님이 만들어주신 비빔밥에선 향기로운 들기름 냄새와 함께
거실의 소품들처럼 깔끔한 맛이 났다.

몇 번 소개한 것처럼 빨간내복님은 샌디에고의 가객(歌客)이다.  
그의 블로그( http://leebok.tistory.com/ )에는 직접 기타 연주를 하며
부른 노래들로 가득하다.  

노래보다 감동스러운 것은 빨간내복님과 지수맘님, 그리고 지수,
이렇게 셋이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동화와 같은 삶이다.
상대방의 삶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 만남이 만들어내는 부가가치라면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을
만나면서 그런 부가가치를 크게 선물로 받은 사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셨다면 천지개벽이라며 놀라실
나의 서툰 부엌일의 시작은 사실 그가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도중 서쪽 창문이 붉게 물들었다.
저녁노을이었다.
아내와 나는 와인잔을 들어 주인장 내외와 ‘짠!’을 나누었다.

떠나온 옛집에서 이삿짐에 끈끈하게 묶여 따라왔을
이 가족만의
사랑이,
행복이,
희망이,
건강이,
따뜻함이,
즐거움이,
절창의 노래와 맛있는 음식이
매일 저녁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이 자리에 함께 하리라 믿으면서.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한폭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조태일의 시, 「노을」중에서 - 

*글의 제목 “이서방네 노을”은 빨간내복님이 좋아하는
정태춘의 노래 “장서방네 노을”을 바꿔본 것이다.
빨간내복님의 성씨가 이(李)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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