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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잘 먹고 잘 살자 34 - 서울 숙대 입구 "그때 그 호떡"

by 장돌뱅이. 2013. 8. 15.

철없던 시절. 가보고 싶은 곳이 두 곳이 있었다.
여자대학교 기숙사와 수녀원.
‘바바리맨’ 보듯 이상한 쪽으로 생각지 마시라. 그곳에 계신 분들껜
죄송하지만 그냥 젊은 시절의 단순 호기심이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다만 축구 경기가 종료된 뒤에 들어간
골처럼 유효기간이 지난 뒤에 이루어져 성취감이(?) 사라진 것이 문제였다.

여대 기숙사는 오래 전 지방도시에서 신입생으로 올라오는 딸아이 친구의
이삿짐을 날라주러 이화여대에 들어가 보았다. 내가 그 옛날 대학생이었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발걸음도 허둥거렸을지 모르겠으나 부모 된 마음이라 이제
막 객지생활을 시작하는 어린 딸아이 친구에게 애틋한 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수녀원은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우연히 가볼 기회가 생겼다.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특별한(?) 호기심을 가지기 전에 수도원 특유의 엄숙함과 경건함의 무게에
압도당한 채 발뒤꿈치를 들고 안내하는 분의 뒤를 따라 시설의 일부를 돌아보았다.
인자한 인상의 나이 든, 그러나 소녀들처럼 보이는 수녀님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수녀원을 나오는 길에 호떡집이 있었다.
30년 전통의 “그 때 그 호떡.”
나이 드신 노인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집이었다.
아내와 들어가 호떡을 먹었다.할머니는 자신의 가게와 음식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할머니 30년 동안 이곳에서만 일해 오신 거에요?”
“그럼 정확히 32년째지.”
호떡은 한 개에 1000원. 할머니는 꿀이 든 일반 호떡 외에 당신이 개발했다는
야채호떡도 추천해 주었다. 아내와 나는 하나씩 사서 나누어 먹었다.
할머니는 또 당신이 직접 육수를 만들었다고 오뎅국물도 먹어보라고 했다.
아내는 국물과 함께 오뎅도 한 꼬치를 먹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 호떡을 사먹었던 1960년대 호떡 값은 한 개에 5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려 200배의 변동이 있은 것이다.
문득 그 세월동안 변하지 않은 것들도 생각해본다.
일생을 영혼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수도정진에 힘써온 늙은 수녀님이나
쉬지 않고 호떡을 만들어 자식들을 키워왔을 할머니가 서로 닮아 보이기도 한다.
끈끈한 삶을 걸고 변하지 않는 것들은 거룩하다.
무덤덤해진 감정처럼 변화가 아닌 퇴락을 수궁하고선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나를 돌아본다.

*“그때 그 호떡”은 지하철4호선 숙대입구역 10번 출구로 나와 숙대로 오르는 길에 있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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