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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기타

뉴질랜드 여행7

by 장돌뱅이. 2013. 8. 16.

살다보면 어떤 사건이 있고 난 후에야 그 보다 앞선 시간에 있었던, 여느 때와는 다른 느낌이나 감정, 행동 등이 
혹시 그 사건을 미리 암시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날이 그랬다.

아침에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비가 내렸다. 전날 오후부터 시작된 비였다.
평소 비오는 날을 싫어해 본 적이 없음에도 (비가 귀한 샌디에고에 살면서부터는 좋아하기까지 했음에도)
이 날의 비는 괜스레 우중충해 보였다. 여행 중이라 맑은
날씨를 갈망해서가 아니었다.
이 날은 데카포 TEKAPO 호수를 돌아서 마운트쿡
MT. COOK 마을까지 가는, 이동이 주요 일정이라 비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가 차분해서 평소 같으면 좋아해야 맞다. 음악을 들으며 빗길을 달리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 이유 없이 시큰둥한 기분이 들었다.


식구들이 자고 있어 혼자 산책을 나서다 주차장에 세워 놓은 내 차의 옆 범퍼가 제법 깊고 굵게 파인 것을 보았다.
옆에 세워져 있던 차가 나가며 한 짓 같았다. 긁힘의 강도로 보건대 운전자는 분명 묵직하게 걸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가버린 것이다. 차를 빌리며 풀옵션의 보험을 들었기에 내게 금전적 손해는 없겠지만 무례하고 괘씸한 짓이었다.
한편으론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나를 찐득하게 감싸던 기분 나쁜 예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피식 냉소적인 웃음을 날리고 말았다. 

호숫가를 걸어 보았다. 어제 낮과는 다르게 온통 잿빛 이었다. 거기에 바람마저 불어 비가 흩날렸다. 
기분 전환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 차에 관한 일은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뭔가 찌뿌둥하고 끈적끈적하면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만 내지는 불안감을 느떨쳐내지 못한 채,
짐을 꾸려 예정된 일정을 따라 빗길 속으로 차를 몰았다.
길 위에서 '그 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

와나카와 데카포 호수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트와이젤 TWIZEL 을 지나 오늘의 중간 목적지인 데카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길은 빈 들판을 가르며 지평선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아내와 딸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속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느닷없이 차가 왼쪽으로 확 쏠렸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운전대를 반대인 오른쪽을 급격히 꺾었으나
차는 제어가 되지 않고 스키를 타 듯 미끄러져 중앙선을 넘었다.
이번엔 급하게 다시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자 차는 바닥을 긁는 진동과 함께 빙글 돌더니 달리던 방향과
정반대로 향한 채로 멈추어 섰다. 도로 위를 거꾸로 된 S자를 그리며 휘저은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와 산과 들이 마치 카메라를 급박하게 회전시키는 액션영화 속의 장면처럼 뒤엉키며 요동을 쳤다.
잠에서 깬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차가 멈춘 후 운전대를 손에 쥔 채 식구들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아내는 괜찮았다. 뒷좌석에서 누워 자던 딸아이도 별일은 없이 목만 좀 뻐근하다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뒤따라오던 차가 있었거나 마주 오는 차가 있었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순간이었다.

실제 마주 오던 차가 급정거를 하여 코앞에 서있었다. 차에서 내린 청년 두 명이 놀란 얼굴로 달려와 괜찮냐고 물었다.

내려서 보니 왼쪽 타이어가 완전히 납작해져 있었다.
아침부터 붙어 다니던 찜찜한 기분의 '그 놈'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청년들은 차를 길 옆으로 빼주고 안전표지판을
설치하더니 자신들의 공구를 가져와 직접 타이어를 갈아주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해도 가서 놀란 식구들을 진정시켜주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할 일은 그를 위해
별 효과도 없는 우산을 씌워주는 일뿐이었다.

사고로 놀란 가슴에도 청년들의 친절은 감동이었다. 둘 다 20대의 뉴질랜드인이었다. 한 청년의 이름이 낰 NACK 이라고 했다. 
비를 맞으며 타이어를 갈아주고 난 후
너무 놀라지 말라고 식구들에게까지 재삼 당부하며 청년들이 떠났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간 전통 문양의 작은
기념품 몇 개를 선물로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급작스런 사고도 그 뒤에 연이은 외국인의
친절도 모두 꿈같이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지옥과 천당을 경험한 것이다.


*위 사진 : 사고 뒤 구난차를 기다리며 찍은 사진.

그런데 아직 두 번째 천사가 남아 있었다.
청년들이 떠난 뒤 좀 전까지 청년들과 함께 테스트 해 볼 때도 괜찮던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보험회사에 알려야 했다. 
로밍을 하지 않은 탓이지 전화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다시 지나가는 차를 세워야 했다.
이번엔 젊은 부부였다. 역시 뉴질랜드인이었다. 뒷좌석에 세 살 정도의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여자가 흔쾌히 전화를 걸어주었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2차 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차를 좀 더 측면으로
붙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함께 차를 밀어주었다. 보험회사의 구난차가
오기로 했다고 여자가 전해 주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차가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 주겠단다.

괜찮다고 이젠 갈 길을 가라고 해도 도리어 나보고 비 맞지 말고 차로 돌아가 쉬라고만 했다.
구난차가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전화로 재차 확인하고서야 부부는 나에게 등이 떠밀려 떠났다.
좀 전의 청년천사들에게 기념품을 몽땅 주어버려 부부에게는 줄 것이 감사의
인사 밖에 없었다.

타인이란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이라는 말이 있던가?
윤회의 삶 어느 먼 곳에선가 그들과 우리는 어쩌면 가족으로 예정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이미 우리가 가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에서 돌아와
한동안 아내와 나는 우리 사회에 있는 낯선 ‘가족’, 외국인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굴빛과 말이 다른 먼 나라에서 온 그들과 만났을 때 우리도 뉴질랜드에서 만났던 두 명의 천사들처럼
기꺼이 행동하자고 다짐을 했다.


구난차 기술자는 차의 시동을 회복시켜 주었다. 다른 특별한 결함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도로 위에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에 타이어가 펑크가 나면서 고인 빗물에 미끄러진 것이거나,
그 반대로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유리 조각에 타이어가 펑크난 것 같다고 추측했다.
두꺼운 유리 조각이 꽤 많이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얼마 전에도 사고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침부터 누군가에게 긁히고 위험천만한 사고까지 생기니 차에 정이 떨어졌다.
구난차 기사에게 다른 차로 바꾸어 달라고 
했지만 그는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 렌트카 사무실로 가라고 했다.
즉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릴 퀸즈타운으로 가라는 말이었다. 일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몰아 가까운 데카포호수 근처의 보험사 지정 오토샾에서 추가 점검과 수리를 받았다.
그곳 기술자도 스페어 타이어를 교체해 주는 것 이외에  큰결함은 
없다고 했다.
이 날 이후 여행 끝까지 차는 뒷트렁크
쪽의 소음 이외에 다행히 별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

차를 고치고 우리는 데카포 호수 근처에서 식사를 했다.
창밖으로 호수가 보이는 식당이었다. 어쩌면 이런 풍경을 못 볼 수도 있었던 끔찍한 순간을 겪은 터라,
식사를 하고 있는 내가 그리고 우리 서로가 신기해 보였다.

늦은 점심이지만 커다란 축복으로 실감나게 안겨왔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이 평범한 순간을 지켜준 하늘에 감사했다.

식사 후 호수 옆에 있는 선한목자교회 CHURCH OF THE GOOD SHEPHERD와
양몰이 개동상을 잠깐 둘러보고 마운트쿡 MOUNT COOK 으로 향했다.
맑은 날이면
데카포호수는 빙하가 녹은 물 특유의 푸른빛인 MILKY BLUE를 띈다고 하는데,
비가 오는 탓에 제대로 된 푸른빛을 볼 수 없었다. 교회 문도 날씨 때문에 잠겨 있었다.
마운트쿡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푸카키 호수의 빛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별 아쉬움이 없었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도로 위에 물기가 고인 부분을 지날 때는 섬뜩섬뜩 긴장이
되긴 했지만
무사건강한 몸으로 길 위를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울 뿐이었다.

마운트쿡의 YHA에서 아내와 딸아이는 숙소의 열악함을 찾아내 또 일과처럼
나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유쾌했다. 그리고 또 다시 감사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식당에서 뒤섞여 저녁을 지어 먹고 우리는 맥주로 축배를 들었다.

이 살아있음의,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일상의,
찬란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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