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싱턴 특파원’이라는 말은 귀에 익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자주 듣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워싱턴이 각종 소식의 원천이고 그 소식은 지구 반 바퀴를 사이에 두고 사는
우리에게도 자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겠다. 어디 우리뿐이겠는가.
좋든 싫든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워싱턴에서 나오는 뉴스를 흘려듣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워싱턴 D.C.(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 이하 DC)는 미국의 수도라는 의미 이상이다.
미국 정치의 중심이자 세계 정치의 중심이다.
DC는 탄생부터 정치적 산물이었다. 1789년 조지워싱턴을 초대대통령으로 연방정부가
탄생하였을 때, 각 주마다 수도 유치를 위해 각축을 벌였다. 그 정치적 타협이,
미국의 어느 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된 행정구역인, 지금의 DC이다.
위치상으로도 당시 미연방을 구성하는 13개 주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호텔에서 가까운 백악관부터 돌아보는 것으로 DC의 첫 여정을 시작했다.
정치와 권력의 세계적 상징과 비중을 지닌 백악관 - 긴박한 목소리로 뉴스를 전하는
‘워싱턴 특파원’ 덕분에 눈에 익은 건물이다. 초대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모든 대통령이
이곳에서 직무를 보았다고 한다.
*위 사진 : 백악관의 북쪽 모습
백악관 내부 관람은 2013년 3월부터 “FURTHER NOTICE”까지 중단되어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차피 내부를 둘러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급하게 시작하는 아내와 나의 여행 형태로는 (3주 전부터라지만
제한된 인원 때문에 실질적으로) 6개월 전의 예약이란 어려운 일인데다가
지역 국회의원(이나 외국인은 해당국가의 대사관)을 통한 예약이라는
절차상의 번거로움이 만만찮다.
게다가 ‘워싱턴 특파원’도 아닌 여행자로서 구태여 내부까지 들러볼
시간이나 관심이 없기도 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백악관 북쪽 문 앞에는
미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과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학생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외국인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경비 경찰관의 긴장된 눈빛에 개의치 않고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과
왁자지껄한 소음을 만들며 수학여행 대열로 늘어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다. 푸른 잔디와 붉은 장미(튤립?) 위의 흰 색 건물은
아침 햇살 속에 단정하고 깔끔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사람들은
자꾸 밀려왔다. 먼저 왔던 사람들은 빠져나가며 인파가 얽히고설키며 백악관 앞
도로는 장터처럼 들썩였다.
*위 사진 : 백악관의 남쪽 모습
우리는 재무부 건물을 돌아서 백악관 남쪽으로 갔다.
북쪽 보다 남쪽 모습이 사진이나 방송을 통해 더 익숙한 모습이었다.
백악관에서 남쪽으로 광장(THE ELLIPSE) 건너편엔 DC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워싱턴 기념탑 WASHINGTON MONUMENT 이 있다. 1848년 독립기념일에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남북전쟁 등으로 공사가 지연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885년 높이 169.2미터로 완성되었다.
이보다 높은 건축물은 DC에서는 지을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DC 시내
어느 곳에서든 쉽게 눈에 들어온다. 지리가 낯선 여행자에겐 편리한 이정표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엔 엘리베이터로 탑 꼭대기에 올라가면 DC 일대를 조망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탑 전체가 수리중이라 비계 구조물로 둘러싸여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2011년에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탑에 균열이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백악관 남쪽의 워싱턴 기념탑 일대와 국회의사당, 그리고 포토맥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몰 NATIONAL MALL 이라고 부른다. 푸른 숲의 공원과 각종 기념물, 그리고 수많은 박물관이
밀집되어 있는 DC여행의 핵심지대이다.
특히 타이달 베이슨 TIDAL BASIN 주위로는 워싱턴 기념탑을 비롯, 링컨 기념관
LINCOLN MEMORIAL, 프랭클린 루즈벨트 기념관 F. ROOSEVELT MEMORIAL,
제퍼슨 기념관 T. JEFFERSON MEMORIAL, 마르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
MARTIN LUTHER KING JR. MEMORIAL 등의 정치 지도자 기념물과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 전몰자 위령비 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일대는 메모리얼 파크 MEMORIAL PARK라고 부르며
백악관을 포함하여 모두 미국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기념물의 이름들만 들어도 메모리얼파크의 주제가 정치와 전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근현대 세계사를 관통한 DC의 주제이자 곧 미국의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전쟁과 정치의 상관관계를 말해왔다. 19세기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유명한 저서 『전쟁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행동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도구요,
모든 정치적 관계의 계속이며,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의 실행이다.”
여기서 ‘다른 수단’이란 “폭력의 극한적 행사”를 말한다.
그보다 더 오래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BC 540 ~ 480 무렵)는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까지 말했다. 많은 경우 전쟁은 종종, 공동의
적을 만들어내고 애국심을 고취하면서 국민을 동원하고 통합하는,
정치이며 교육이고 선전이며 문화이고 중요한 비즈니스 활동이었다.
워싱턴 기념탑에서 정서(正西) 쪽으로 걸으면 제2차 세계대전기념비 WORLD WAR II
MEMORIAL 와 리플렉팅풀 REFLECTING POOL, 그리고 링컨기념관이 나란히 있다.
미국인들은 2차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2차대전 참전의 결과로 자본이득이 증가하였고 더불어 투자와 고용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던 것이다. 인명의 손실이 불가피했지만 미국토가 전쟁터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른 참전국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전쟁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을 체득하였다.
더구나 ’악의 축‘인 파시즘을 멸망시켰다는 명분도 얻었으니 ’VERY GOOD‘의 전쟁이
아닐 수 없겠다. 문제는 학습의 결과이다. 미국은 이후 제3세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내전, 내란, 혁명, 사회운동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입해서 사실상의 전쟁을 수행해왔다.
*위 사진 : 2차세계대전 기념비
링컨기념관은 리플렉팅 풀 REFLECTING POOL을 사이에 두고
2차 세계대전 기념비의 반대편 끝에 있다. 흰 색의 네모난 건물이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도리스 양식의 기둥이 앞면에 가지런하다.
*위 사진 : 링컨기념관
링컨의 정치적 역정(歷程)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원칙이자
목표로 그가 제시한 게티즈버그의 연설은 이견이 있을 수 없으며 세상의 모든 권력과
정부에 대한 평가의 기준으로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그 연설문이 기념관 내부 남쪽 벽에 새겨져 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위 사진 : 베트남전쟁 전몰자 추모비와 동상
링컨기념관을 바라보며 오른쪽에 베트남전쟁 전몰자 추모비 VIETNAM VETERANS MEMORIAL 가 있다.
베트남전쟁에서 죽거나 행방불명된 58,267명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이다.
전쟁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죽은이들의 이름이 죽은 날자 순으로, 그리고 알파벳순으로도 새겨져 있다.
입구에는 전화번호부만한 크기와 두께의 사망자 인명부가 비치되어 있기도 하다.
미국은 1964년 소위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의 전쟁을 치룬 끝에 1975년 봄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를 하게 된다.
1971년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의 음모와 조작의 전모 - 이른 바 ‘국방성 비밀 문서
(THE PENTAGON PAPER)를 세상에 폭로한 뉴욕타임즈는 베트남 전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모든 판단은 월남 사태에서 미국이 본래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에 도달했다.
(......) 그것은 미국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처음에는 공산주의의 봉쇄에 있었으나 그것이 차차
미국의 힘, 그 영향력 및 그 위신의 보호라는 목적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단계에서도
베트남과 베트남인민의 현지사정은 전적으로 무시되어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국의 패배가 임박한 1975년 4월14일에는 또 이렇게 보도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거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이다.”
‘모든 일이 잘못된 전쟁’에서 스러진 6만 명에 이르는,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것이고
부모였을 것이며 형제였을 것이고 누이였을 사람들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의 희생과 남은 사람들의 고통.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잣대는 여기에도 유효할까?
그러나 그것만이 베트남전쟁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크라우제비츠가 말하는
‘폭력의 극한적 상황’에 10여 년 간이나 노출되었던 베트남사람들과 베트남이란
국토가 있기 때문이다.
빽빽하게 새겨진 이름들을 바라보며 아내와 검은 비석을 따라 말없이 걷는데,
앞서 유치원생을 인솔하며 걷던 교사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오늘 우리가 왜 여기에 왔지요?”
눈이 땡글땡글한 귀여운 아이가 앙증맞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우리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요.”
“예 그렇지요. 쏼라쏼라......”
*위 사진 : 한국전쟁 전몰자 추모비
링컨 기념관에서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국전쟁 전몰자 추모비
KOREAN WAR VETERANS MEMORIAL는 베트남전 추모비와는 또 다른
느낌일 들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다. 비감이나 비애라면 적절할까?
“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글귀도, 우의를 걸친 열아홉 명 병사들의
모습도 어떤 평가와 의미를 구하기에 앞서 그냥 가슴이 시릴 뿐이다.
추모비 앞에 놓인 꽃다발 속엔 우리나라 어느 정치인이 보낸
‘우리는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란 글이 적혀 있었다.
‘혈맹’이란 말도 보였다.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을 익히 알고 있는 한국사람은
누구나 그 말의 배경과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의 참전이란 시혜적이고 온정적인 의도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안보나 경제 문제 등에 대한 전략적인 고려, 그리고 냉철한 이해득실의
계산 위에서 행해지는 고도의 정치 행위이라는 사실도 기억해 두어야겠다.
어떤 당사자에게 전쟁은 폭탄의 굉음과 무너지는 건물과 치솟는 검은 연기와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미국 경제는 하향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자가 감소하고 실업률은 다시 치솟았다. 한국전쟁은 많은 이런 문제의 많은 부분을
해결하여 주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은
“한국이 따라와서 우리를 구해주었다”(KOREA CAME ALONG AND SAVED US.)고 말했다.
한국전 발발의 소식을 들으며 ‘이제 일본은 살았다’고 쾌재를 불렀다는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도 있지 않던가.
요즈음 들어 남북한의 관계는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정치적이나 외교적 수사라고 하기엔 끔찍한 ‘전쟁불사’란 단어가 마치 일상용어처럼
지난 일 년 간 너무 쉽게 남발되었다. 이 와중에 미국은 한국의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자신들의 전투기를 사라고 요청했다.
단군 이래 최대 무기도입 사업을 위한 예산은 무려 12조에 달한다고 한다.
베트남전쟁의 민족해방 전사였으며 시인이며 소설가인 반 레가 말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것을 통해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너무 안이한 해답인가? 그러나 세상의 많은 문제는 늘 ‘유치원 때 이미 배운’
이 평범한 말을 망각하는데서 생겨나지 않던가?
(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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