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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2

대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꺾는 것이다 또 한 잔 꺾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 고재종, 「대설」 - 대설은 소설과 동지 사이에 있는 스물한 번째 절기다. 눈이 많이 와서 대설이라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 날도 많다. 대설에 눈이 많이 오면 보리농사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어제는 비가 왔는데 오늘은 하늘이 맑다. 날씨도 푸근해서 눈이 왔더라도 또 비가 되어 내렸을 것이다. 기대할 풍년의 보리농사나 하루쯤 밀어둘 세상잡사가 있을 리 없는, 손자를 빼곤 눈 맞으며 특별히 보고 싶은.. 2023. 12. 8.
밤꽃 피는 유월에 "언제부터 여름이야?"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던 손자친구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여름? 여름은 유월부터. 그러니까 내일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으니, 5월31일까지가 봄이고 6월1일부터 여름이라는 건 너무 기계적인 설명이었지만 달리 어린 친구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말을 하고나니 하루 뒤로 다가온 여름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기대'겠지만) 들기도 했다. 오직 한 가지 '코로나'로만 기억될 2020년의 봄은 지루했고 잔인했다. 수많은 생명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놈 때문에 스러졌고 남은 우리는 '만지지도 만나지도 않으며' 살고 있다. 어린 손자친구가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놀이터를 질주하는 시간으로. 마스크를 반복해서 여며주는 일 없이 친구가 좋아하는 이.. 2020.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