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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6

대박의 꿈 손님들과 골프 모임을 갖는 중이었다. 드라이브샷을 날리고 필드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아랫배가 묵직해 왔다. '자연의 부름(Nature's Call)'이었다. (음······ 우회적으로 표현하려니 긴박함이 살아나지 않는다. 직접적인 우리말 표현으로 전환해 본다.) 한마디로 똥이 마려웠다. 그것도 매우 화급했다.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의아해하는 일행들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서는 순간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건강한 황금색의 '그놈' 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양이 엄청났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배가 시원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났다. 하도 생생해서 혹시 진짜로 실수한 것이 아닐까 몸을 만져볼 정도였다. 그런데 이틀 뒤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번엔 .. 2021. 12. 22.
제주살이 4 - 옥상에 빨래 널기 밤 사이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으면서 점차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창밖을 가리던 칙칙한 구름이 한라산 꼭대기로 몰려가자 강렬하고 눈부신 햇빛이 옥상 가득히 쏟아져 내렸다. 문득 햇빛이 아깝다는 생각에 서둘러 이불과 옷 빨래를 가져다 널었다. 숙소에 건조기가 있지만 제주의 햇빛과 바람에 댈 게 아니다. 빨래는 오래지 않아 바짝 마르고 햇볕을 가득 품어 뽀송뽀송해질 것이다.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 2021. 9. 30.
내가 읽은 쉬운 시 95 - 이상국의「국수가 먹고 싶다」 아파트 화단에 벚꽃이 절정인 봄날이지만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탁한 막걸리 빛 구름이 하루종일 하늘에 드리워 있다. 늦은 오후엔 비소식도 있나 보다. 이런 날은 부침개나 따끈하게 국물이 있는 국수가 제격이다. 마침 어제 노노스쿨에서 "칼국수"와 "달래 새우전"을 배웠으니 더할 나위 없이 딱이다. 배운 순서에 따라 밀가루를 집어들다 문득 드는 생각, '아! 우리집에는 홍두깨가 없지!' 어제는 밀가루 반죽을 하여 숙성을 시켰다가 홍두깨로 직접 밀어 칼국수를 만드는 제대로 된 과정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없는' 사정이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마트에서 생면을 사왔다. 홍두깨는 흔히 칼국수나 만두를 만들 때 쓰는 동그란 막대기만을 생각하지만 원래 홍두깨는 "다듬잇감을 감아서 .. 2019. 4. 6.
내가 읽은 쉬운 시 71 - 이상국의「달은 아직 그 달이다」 *위 그림 : 신학철의 「달밤」(2016년 가나아트센터 "리얼리즘의 복권"전에서 촬영) 유난스레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지는 이번 한가위다. 하늘이 '째지게' 솟은 한가위 달. 그리고 기분도 마냥 '째지던' 어린 시절. 멀리 떠나왔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가야 할, 그 아득한 고졸(古拙)의 세상. 달은 언제나 그 달인데······.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 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 밖 에 못.. 2017. 10. 4.
내가 읽은 쉬운 시 53 - 이상국의「감자떡」 30여년 전 결혼 초기 어느 날 조리법을 소개하는 TV 프로를 보는 아내에게 빈정거린 적이 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으므로 그런 정보는 텔레비젼이나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저기 나오는 재료로는 그냥 몽땅 쓸어넣고 찌개로 끓이면 다 맛있어. 뭘 골치 아프게 지지고 볶고 한다는 거야." 굳이 '먹방'이 대세인 요즈음과 비교하지 않고 당시의 기준으로 판단하더라도 그런 프로를 유한마담들을 위한 무의미한 유희라고 함부로 단정했던 나의 단순과 무지에서 나온 오만이었다. 근래에 들어 아내를 대신해서 부엌에 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아내와 책과 인터넷으로부터 이런저런 조리에 관한 상식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느끼는 건 세상의 다른 일처럼 조리도 어렵다는 사실이다. 같은 채소도 세.. 2016. 8. 29.
내가 읽은 쉬운 시 39 - 이상국의 「매화 생각」 입춘. 봄에 한 발을 들여놓은 날. 점심시간에 지인과 함께 덕수궁 주변을 걸었다. 갑자기 푸근해진 날씨외에 봄의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화사한 꽃들로 채워질 고궁의 빈자리는 이제 지난 겨울이 되어버린 어제처럼 허전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지인은 벌써 남쪽 섬진강변의 매화와 산수유를 이야기 했다. 올 것이 오는 와야할 것이 오는 혹은 올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는 봄 그리고 희망. 겨우내 그는 해바라기하는 달동네 아이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담장을 기어오르다 멈춰선 담쟁이의 시뻘건 손을 생각했던 것이다 붕어빵을 사들고 얼어붙은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아버지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있어선 안된다고, 누군가 먼저 가 봄이 오는 걸 알려야 한다고 어느 날 눈길을 뚫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 생각만.. 2016.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