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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6

너무 지당한 말씀의 『산산조각』 '국민학교' 시절 매주 월요일의 애국조회,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길었다. 지당하고 귀한 말씀이겠지만 친구와 나는 끝날 듯하면 이어지는 선생님 연설에 "에···"나 "또···"를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며 지루함을 견뎌야 했다. 아침 햇살 속에 주변에 가끔 쓰러지는 아이가 있어도 '다아! 너희들을 위해!' 하는 말씀은 음의 높낮이도 흔들리지 않고 느릿느릿 계속되었다. 정호승의 『산산조각』에는 그런 지당한 말씀들로 가득하다. 가수 김광석의 노래 중에 이 있던가. '지당'도 너무 많거나 노골적이면 '지당'이 아니게 된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긍정과 순명(順命)의 내공은 내게 어렵다. 솔직히 '지당'을 넘어 '황당'까지 느껴진다. 나는 정호승이 이런 소재들을 .. 2023. 8. 5.
제주살이 30 (끝) 제주 숙소 주인의 문자를 받았다. 주말에 거둘 귤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주인 부부가 오래 가꾸어온 수고를 알기에 그냥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여유롭고 감미로웠던 제주 한 달은 같은 느낌의 여운으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16세기 조선의 문학가 백호 임제는 제주도 한라산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저 동정호(洞庭湖) 7백 리 물도 이에 비하면 물 한잔 쏟아놓은 웅덩이와 다름없다" 고 외쳤다. 물론 중국의 호수가 아무리 넓어도 거칠 것 없는 일망무제의 바다에 견줄 바가 아니므로 당연한 표현이겠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큰 물의 상징으로 존재해온 동정호라는 상투적인 관념을 호기롭게 깨뜨려 버린 것이다. 다시 제주 바다와 산과 오름과 숲을, 그 속에 사는 사람들과 이.. 2021. 12. 11.
내가 읽은 쉬운 시 65 - 정호승의「그는」 하루 한 번 묵주기도를 바치는 길지 않은 시간조차 나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 온갖 상상의 분심들이 기도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그러다 뜨끔해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기도 한번 제대로 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때도 있다. 노랫말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나의 미망 때문이리라. 내일은 부활절. 하루라도, 아니 하루의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가 살고 죽고 부활하며 우리에게 남겨주었다는 넓은 평화의 웅덩이에 크고 작은 내 삶의 고민들을 아무 생각없이 던져보아야겠다. "(그리스도) 형님, 너저분한 제 일상의 보따리 우선 하루만 맡겨 놓겠습니다. 그리고 개구장이로 신나게 놀아보겠습니다. 부활 감사합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 2017. 4. 15.
내가 읽은 쉬운 시 21 - 정호승의「발에 대한 묵상」 아내가 발을 다쳤다. 한달이 넘게 약식 기브스를 하고 양의를 거쳐 지금은 한방 치료 중이다. 뼈는 붙었다지만 아직 붓기가 가라앉지 않아 거동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덕분에 일상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귀국 직후에 있게 마련인 국토여행에 대한 심한 갈증을 달래며 외부 활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대신 부엌에 서는 일이 많다 보니 나의 요리 메뉴가 몇 가지 더 늘어나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있고서야 비로소 절실하게 깨닫는 것들이 있다. 건강도 그렇다. 건강은 늘 '당연하거나 당연해야 하는' 것이어서 감사함을 잊고 지내기 쉽다. 그러나 몸 어느 한 부분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이 그 부분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온몸이 함께 아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건강이외에 이와 비슷한 다른 것들도 함께 생.. 2014. 7. 15.
내가 읽은 쉬운 시 17 - 정호승의 「너의 무덤 앞에서」 이 땅을 걸으면 오늘도 내 발목엔 너의 쇠사슬이 채였나보다 이 하늘을 바라보면 오늘도 내 두 눈엔 너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나보다 아들이 아버지를 묻어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묻어주는 오늘밤 눈발이 날리는 산 모퉁이 하늘가로 울며 떠나가는 네가 보인다 검은 낮 하얀 밤마다 먼 길을 와서 또 다시 먼 길을 가는 자여 바람은 왜 어둠 속에서만 불어오고 새벽이 오기 전에 낙엽은 떨어지는가 송장 냄새 그득하였던 그 해 도시에는 바람도 창을 흔들지 않았고 싸락눈 맞으며 산새가 되어 어느 하늘 산길 가는 너를 쫓으며 나는 그 누구의 눈물에도 고향 하늘에는 가 닿을 수 없었다 - 정호승의 시, 「너의 무덤 앞에서」-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아무도 너희에게 가지 않았다. 2014. 5. 24.
재의 수요일 자주 그러진 못하고 가끔 아주 가끔 일주일에 단 한번 참석하는 미사보다 더 가끔, 내 삶이 나 혼자서 가꾸어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겸손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성당에서 돌아오며 그런 순간들을 앞으로 40일 동안만이라도 좀 더 자주 떠올려보자고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호승의 시, "햇살에게"- 2013.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