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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65 - 정호승의「그는」

by 장돌뱅이. 2017. 4. 15.

하루 한 번 묵주기도를 바치는 길지 않은 시간조차 나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
온갖 상상의 분심들이 기도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그러다 뜨끔해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기도 한번 제대로 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때도 있다.
노랫말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나의 미망 때문이리라.

내일은 부활절.
하루라도, 아니 하루의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가 살고 죽고 부활하며 우리에게 남겨주었다는 넓은 평화의 웅덩이에 크고 작은 내 삶의 고민들을 아무 생각없이 던져보아야겠다.

"(그리스도) 형님, 너저분한 제 일상의 보따리 우선 하루만 맡겨 놓겠습니다.
그리고 개구장이로 신나게 놀아보겠습니다.
부활 감사합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정호승,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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