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끼고 5일 동안의 짬이 생겼다. 늘 그렇듯 여행을 생각했다.
하와이(빅아일랜드)를, 그곳의 활화산을 목표로 잡았다.
틈 나는 대로 책과 인터넷을 뒤지고 아내의 의견도 물어가며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인터넷 예약의 클릭만 남겨둔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아내가 여행 대신에
이번엔 샌디에고의 이곳저곳을 오래 걸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다.
여느 때완 다르게 가방을 꾸리고 공항을 통과하는 과정이 부산스럽게 생각되고,
먼 곳으로 가는 여행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 얼마 남지 않는 미국 생활이니 한 곳이라도 더 가보자는, ‘밀린 숙제 해치우기’ 식의
수동적인 여행 동기가 주는 권태(?)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오래 누적된 갈망이나 갈증이 없는 여행에 진한 해갈의 맛이 기대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샌디에고 걷기로 급선회를 한 다음의 문제는 얼마만큼의 거리를 어느 곳에서 걸을 것인가?였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유방암 퇴치 기금조성과 홍보를 위한 걷기행사” 광고가 있었다.
하루에 20마일씩 3일을, 그러니까 약100킬로미터를 걷는 행사였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579 )
우리는 거기에 힌트를 얻어 하루에 20킬로미터씩 5일을 걷기로 했다.
히말라야나 산티아고의 트레일을 걸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하루 20킬로미터, 총 100킬로미터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짧은 거리겠지만, 체력이 약한 아내에게는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어디를 걸을 것인가는 샌디에고를 정리하는 걷기인 만큼,
뭔가 샌디에고를 상징할 수 있고 거기에 우리의 기억에도 뚜렷한 곳을 찾았다.
바다(LA JOLLA ), 해변(TORREY PINES 와 MISSION BAY), 공원과 시내(BALBOA PARK 와
DOWNTOWN), 호수(LAKE MURRAY)와 골프장 주변(CHULA VISTA GOLF COURSE)이 정해졌다.
세부 코스와 거리는 샌디에고에서 벌어지는 여러 하프마라톤 코스를 참조했다.
우리끼리지만 행사의 이름도 만들자고 하여 아내가 제시한 “쌘걸100KM”로 하기로 했다.
‘쌘디에고를 걸어 다닌다’는 뜻이다. 구태여 처음을 된소리 ‘쌘’으로 한 것은
‘쎈(HEALTHY) 걸(GIRL)’이라는 아내를 격려하기 위한 의미도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샌디에고의 야구팀인 파드레즈(SD PADRES)의 로고가 찍힌 삼각머플러로 배낭을
장식하니 마치 먼 원정길이라도 나서는 탐험대 같았다. 좀 유치해 보이기도 했지만
재미에는 약간의 유치함이 필요하다고 믿기로 했다. 아내는 자신의 체력를 미심쩍어 하면서도
‘샌디에고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유쾌하게 와인잔을 들었다.
1. 라호야 LA JOLLA 코스
라호야 해변은 집에서 북쪽으로 30분쯤 떨어져있다. 샌디에고의 베버리힐스라고 불릴 정도로
고급주택들이 즐비하다. 화방과 유명 의류점, 맛있는 음식점들이 밀집된 곳이기도 하다.
출발점은 라호야 코브 COVE.
북쪽으로 토레이파인즈 주립공원 경계선까지 갔다가 원점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우리의 첫 걷기는 라호야 하프마라톤 코스로 잡았다.
위 지도에서 보면 13번에서 7번까지다. 나머지 반은 나중에 걸을 토레인파인즈 코스를 위해 남겨 두었다.
집에서 출발을 할 때는 맑은 날씨였는데 라호야에 도착하니 짙은 해무와 구름이 몰려와 흐린 날씨가 되었다.
샌디에고 날씨답지는 않았지만 강한 햇살이 사라지니 걷기에는 더 없이 편했다.
상가 지역인 프로스펙트 거리 PROSPECT STREET를 지나 토레이파인즈에 로드에 들어서
북쪽으로 따라가면 반환점에 다다르게 된다.
라호야 해변을 벗어나면 길은 자동차도로 옆으로 이어진다.
운전자들의 매너는 더 없이 얌전하지만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자동차들의 속도감과 굉음은 가히 위협적이다.
폭력적이다. 운전할 때와는 상반된 느낌이다.
도로변을 걸어보면 로드킬이라는 상황이 이해가 간다.
가끔씩 거짓말처럼 차가 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고요함은 깊고 소중하다.
차는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 생각과 느낌과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차를 떠받들고 산다.
차에 맞춰 도로가 생기고 마을이 생기고 소비와 여가의 형태가 생겼다.
귀국을 하면 차를 갖지 않거나, 갖더라도 최대한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이지만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 벌써부터 의문이다.
UCSD부근의 체육공원. 녹지가 많지 않은 우리 사회에 비추어 미국의 공원은 늘 부러움이다.
UCSD를 지나면 유명한 토레이파인즈 골프코스와 만난다.
아내와 나는 2008년 제108회 유에스오픈 골프대회를 이곳에서 관람한 적이 있다.
타이거우즈가 연장전 끝에 극적인 우승을 한 대회였다.
입장권을 주겠다는 전화를 지인으로부터 받았을 때 사실 난 그리 내키지 않았다.
골프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화 통화 속에서도 상대방은 그걸 느꼈는지,
"내가 가려고 샀는데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어 드리는 겁니다. 유에스오픈은 미국의 주마다
돌아가며 열리므로 다시 이곳에서 보려면 50년 후나 될 거에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 생전에는 다시 못 본다는 얘기죠." 라는 말로 나를 설득했다.
나는 왠지 '생전 마지막'이라는 말에 나는 그 표를 받았고, 아내에게도 같은 말로 설득을 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이런 농담을 들었다.
"흑인 한 사람을 백인 백명이 쫓아다니는 운동은?" 답은 PGA이다.
그 날 토레이 파인즈에서 아내와 나는 그런 타이거우즈의 위력을 보았다.
그는 관중의 대부분을 몰고 다녔다. 마치 전쟁터를 휩쓸고 다니는 장수와 같았다.
그의 호쾌한 드라이브샷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사람들의 벽 위로 키 작은 아내를 번쩍 들어 올려주어야 했다.
그런 그가 요즈음은 영 아니다. 세월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제 사람들은 이런 농담을 한다.
"조강지처 잘못 모시면 신세 망친다."를 영작하면?
답은 "TIGERWOODS"란다. 그의 여성 편력에서 나온 말이겠다.
반환점이다. 3일 뒤 반대편에서 10km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가 돌아가야 한다.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오자 구름과 안개에 저녁 어스름까지 더해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지친 내색 없이 씩씩하게 걸은 아내는 차를 타고서야 발을 주무르며 힘들어 했다.
2. 시내와 발보아파크 왕복
이튿날 두번째 코스로 매년 8월에 열리는 AFC(AMERICA FINEST CITY) 하프마라톤 코스를 걸었다.
위 지도에서 시내에서 발보아파크에 이르는 후반부를 왕복한 것이다.
샌디에고는 1542년 스페인 사람 까브리요가 상륙한 이래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멕시코의 영토였다가 1848년 부터 미국에 흡수되었다.
우리가 종종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만주를 잃은 것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불과 백여년 전까지 자신들의 영토였던 샌디에고를 미국에 넘겨준 멕시코의 억울함은
그보다 더 클 것이다. 역사적 배경이 어떻든 현재 샌디에고는 아름다운 풍광과 기후로
미국에서 가장 (특히 노후에)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샌디에고 시내를 지나 반환점인 발보아파크에 도착했다. 발보아파크는 1868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1935년에 국제 박람회가 열렸던 곳이니만큼 매우 넓은 면적을 지닌 공원이다.
여러 박물관, 영화관, 음악관, 과학관, 미술관 등이 공원 안에 있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도심을 통과하면 샌디에고만(灣)의 풍광이 펼쳐진다.
아래 사진은 1863년에 만들어진 범선 "STAR OF INDIA" .
요트는 샌디에고의 날씨와 바다에 어울리는 풍경이기도 하다.
길은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다시 20킬로미터를 걷고 난 아내는 전날보다 지쳐보였다. 새끼발가락에 물집도 잡혔다.
저녁을 먹고 바늘로 물집을 따주며 물었다.
"계속할 수 있겠어?"
"해야지." 아내는 '화이팅'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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