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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인도네시아

지난 여행기 - 2001발리5

by 장돌뱅이. 2017. 8. 9.

35. 발리의 글래디에이터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닭싸움 이야기로 시작된다.
점순이네 큰 수탉에게 주인공의 작은 닭은 번번히 면두를 쪼이어 붉은 피를 흘린다.
화가 난 주인공은 쌈닭에 고추장을 먹이면 기운이 뻗친다는 이야기를 믿고 고추장까지 먹여보지만 결과는 참패다.

물론 동백꽃은 주인공을 좋아하는 점순이의 사랑 이야기인지라 닭싸움은 자연스런 시골 풍경 중의 하나인 소품으로
등장한다. 그 때문에 주인공의 지게막대기에 점순이네 장닭이 맞아죽어도 그 정황이 끔찍하기보단 유머러스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발리의 닭싸움은 달랐다. 그것은 발리의 한 전통이긴 하지만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어서 비록 가축끼리지만
피가 섬뜩했고 살기가 느껴졌다.
아메드에서 돌아와 와얀 WAYAN과 함께 동네 사원 앞에서 상시로 열린다는
투계(鬪鷄)를 보러 갔다. 발리는 거의 모든 집집마다 싸움닭을 키운다고 한다. 때문에 시골로 갈수록 동네 어귀
도로변에 싸움닭 한 마리씩을 넣은 종모양의 닭장을 일렬로 세워 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닭을 팔려고 내다 놓은 것인 줄 알았더니 훈련 과정의 일부로 닭이 지나가는 것들을 보며
즐기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해야하는 닭에게 긴장을 푸는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이 '닭대가리'들을 훈련시키는지 모르지만 싸움닭들은 주인으로부터 특별한 훈련과 관심을 받는다고 한다.
원래 닭싸움은 도박, 스포츠, 제물 등의 복합적인 목적을 지닌 사원의 행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바비 ABABI 마을의 닭싸움장은 와얀의 표현을 옮기면 그 냥 'BALINESE CASINO'의 의미일 뿐이었다.
먼저 닭의 주인들이 사람들 가운데로 나와 자기 닭과 싸울 닭을 고른다. 서로 상대방의 닭을 만져보고 자신의 닭과
견주어보기도 하면서 적절한 상대를 고른다. 닭주인들끼리 시합과 배팅 금액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곧 경기준비
- 닭의 한쪽 발에 번뜩거리는 작은 칼을 붉은 실로 고정시키는 작업-에 들어간다. 물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칼이다.

이 때 경기장을 둘러싸고 있는 관중들도 저마다의 상대를 찾아 배팅 금액을 정한다. 닭주인이 배팅한 금액 중 일부는
경기 진행 요원과 경기장 주인 몫으로 공제된다. 싸움 준비가 끝나면 주인이 닭을 손으로 잡고 경기장 가운데에서
상대방과 마주 세울 때 경기장 분위기는 고조된다. 돈을 태운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닭은 깃털을 세우며 전의를 나타낸다.

승부는 싱거울 정도로 금방 결정 난다. 몇차례 푸드득 거리면 재수없는 어느 일방이 상대방의 칼에 어딘가를 찔리게 되고
한번 수세에 몰리면 대게 회복불능이다. 특별한 기술에 의해 승패가 결정 난다기 보다 완전히 우연에 의한 승부같은데
스무번을 이긴 닭도 있다고 하니 놀랍다.
서로 싸울 의지가 없어 피하거나 도망다니면 조그만 닭장 안에 두 마리를 넣어
승부가 나게 한다. 쓰러져 일어서지 못하는 쪽이 지게 된다. 이긴 쪽의 주인은 싸움에 진 닭을 집으로 가져가 조리를
해 먹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붉은 실, 흰색의 칼, 칼에 찔려 흐르는 피.
투우에서 붉은 천을 쓰는 것도 황소를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중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닭의 한쪽 발에 매인 붉은 실도 선명하여 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어쨌거나 인간들에겐 돈을 건
오락일 뿐이지만 닭에겐 목숨을 건 싸움 아닌가.
몇차례의 닭싸움이 있은 후 와얀이 내게 배팅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와얀이 거는 닭의 상대방에게 걸어 내가 이기면 와얀의 돈을 돌려주고 내가 지면 그뿐인 걸로 칠려고 했는데 와얀이
부득불 자기가 잘 아는 닭이며 절대 질 리가 없다고 자신과 같은 편에 걸라고 강요를 하는 바람에 그의 의견에 따르게
되었다. 결과는 순식간에 우리가 걸었던 닭이 쓰러지는 바람에 둘 다 돈을 날리고 말았다.

작년인가 글래디에이터란 영화가 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싸움을 벌이는 로마시대 검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쓰러지면 죽는 발리의 싸움닭들도 바로 그 검투사들 아닌가. 이름을 부치자면 COCK GLADIATOR.

세상엔 참 별스런 풍습도 다 있다.


36. 잘 놀아야 잘 큰다
닭싸움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그 때까지도 옆방의 CAMPELL씨 부부는 세상에서 제일 편해보이는
흐트러진 자세로 베란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책을 읽고 있다. 보아하니 아침 산책을 빼곤
하루 종일 문밖에도 나가지 않은 것 같다. 물어보니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
하루종일 책과 건너편 산자락만 보아도 충분히 즐겁다는 것이다.


*위 사진 : 숙소에서 바라보이는 풍경

저녁 식탁에서 인사를 나눈 또 한 쌍의 뉴질랜드 커플인 ANDERSON씨 부부는 32일의 일정으로 발리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기간이 길다보니 서둘 것이 없어 마음에 드는 곳이면 며칠씩 더 쉬어 가는데
뽄독 바뚜르 인다에서는 벌써 5일째라고 하였다. 느긋하고 조용한 목소리에서 50대의 연륜이 느껴졌다.
일 이년에 한번씩은 일체의 일상을 접고 이런 식으로 한 지역을 천천히 여행한다고 했다.
위 두 부부의 여행 스타일을 두고 혹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없을까?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책을 읽을려고 해외여행을 가다니? 정신 나간 놈들 아녀?
한달 내내 그까짓 코딱지만한 섬하나를 돌아본단 말이야?
그리고 기왕지사 왔으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돌아다녀서 사진 한 장이라도 더 박아야지
뭐 할려고 한 곳에 사나흘씩 묵는단 말이야?
우리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꺼라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엉덩이가 가벼워 어딘가로 꼭 '빨빨거리며' 다녀야 하는
체질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여행과 휴식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과 구조에 있다.
이미 몇 번 인용한 바 있지만 이 경우 구본형의 글이 적절한 지적이다.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는 우리의 휴식시간이 짧다는 것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유시간이 턱없이 짧기 때문에
클라이맥스를 빨리 맛보아야한다. 뜸을 들일 시간이 없다.
   짧은 시간에 농축되어야하기 때문에 진해야되고,
따라서 야만적이고 과격한 몸짓이 되는 것이다. 그
   래서 모처럼의 휴식은 또 다른 노동이 되고 만다.


물론 뉴질랜드 부부들의 여행 스타일만이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행은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저마다의 처지에 맞는 형태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한비야씨처럼 지구상의
오지 여행를 찾아 다니는 여행도 있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등산을 하러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이빙을
목적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미술관을 돌아보러.

단 어떠한 경우 건 5박6일에 동남아 5개국 하는 여권에 도장찍기 여행이나 추억 대신에 '그 현장에 있었다는'
증명사진'만을 찍기 위한 '속도전'의 여행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여행사를 통한 단체관광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런 제도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체여행이 없으면 해외 여행을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니까.
문제는 언제나 여행 형태나 방식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인류의 역사가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인 것은 사실이고 우리 사회가 휴식과 여행에 구본형의 말처럼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장에 서구의 선진국처럼 한달의 휴가를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5일 근무제조차 인색한 우리 사회 아닌가.
우선은 여행과 휴식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는 것이 현실적이다.
'잘 놀았다'는 것이 '과격한 몸짓'의 양적 축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지와 자신이 주고 받는 대화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볼려고 '속도전'의 여행에 몸을 맡길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보더라도 제대로 보려는 자세 말이다.

'잘 놀아야 잘 큰다.'
이것은 울산에 살 때 본 적이 있는 어린이날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의 문구이다.
그러나 어찌 애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내가 여행기를 쓰면서 무수히 반복한 말이지만
결국 잘 산다는 말은 잘 논다는 것이고 잘 논다는 것은 주변과 자신과의 조화로운 결합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 역시 결과가 아니고 과정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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