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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인도네시아

지난 여행기 - 2001발리7(끝)

by 장돌뱅이. 2017. 8. 10.

39. 우붓으로 가는 길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뉴질랜드 부부들과도 기념 사진을 찍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와얀WAYAN의 차를 빌려 우붓으로 향했다. 대중 교통 사용의 원칙을 세웠지만 발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 중의 하나라는 암라푸라 AMLAPURA에서 른당 RENDANG까지의 도로를 달려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붓으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이었다.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갖가지 모양의 계단식논이 나타났다.
도중에 뿌뚱 PUTUNG에 있는 PONDOK HILLTOP RESORT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발아래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조망하였다. 산자락 끝에서부터 잇대어 온통 푸르기만한 바다와 더 멀리 누사펜디아 NUSA PENDIA 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운전을 하는 와얀은 내가 어제 게녝 GENJEK 공연을 보지 못해 아쉽다고 하자 운전대를 두드리며
자신이 공연 때 부르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흥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GOOD BYE SONG'이라고 했다. 나는 답례로 예전에 익혀 두었던 인도네시아 노래 'HATIMU HATIKU
(너와 나의 마음)' 이라는 노래와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

기아냐르 GIANYARD에서는 점심으로 길거리에서 유명한 '바비 굴링 BABI GULING (돼지 바비큐)을 사먹었다.
우붓에 도착해 와얀을 보내고 쯘다나 코티지 CENDANA COTTAGE에 숙소를 잡았다. 코티지는 숙소가
논과 붙어 있어 특이했다. 정원이 논인 셈이다.

우붓에서의 시간 보내기는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내가 어느 덧 우붓과 친근해졌다는 뜻이겠다.
뿌리 루키산 박물관(MUSEUM PURI LUKISAN)에서 그림을 보고 숙소로 돌아와 수영을 하고 책을 보다가
우붓 팰리스 UBUD PALACE에서 레공 춤 LEGONG DANCE을 보고 다시 카페 와얀 CAFE WAYAN에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진행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렇게 편한 점도 있지만 긴장과 설레임이 없어 다소 맹숭맹숭하기도 했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니 옆에 붙은 SARI-SARI 라는 작은 나이트 클럽에서 나오는 전자 악기와 노랫소리가
창문을 넘어들어왔다. 예전에 한적하고 조용하기로 이름난 쯘다나 코티지는 전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 절망스런 노랫소리는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우붓의 급속한 개발과 변모. 개발을 죄악시 할 것만도 아니다.
보존만을 최고로 간주하는 생각은 너무 기계적이다. 어려운 화두이지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준다고 해도 현재 우붓의 개발은 위험수위를 조금씩
넘어서고 있는 듯 보였다.


40. 언제나 그곳을 사랑한다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려 우붓 팰리스 앞으로 나갔다.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덴파사르행 직행 버스가 있는 듯 보였으나 현지인들이 타는 베모를 이용하여 덴파사르까지
가기로 했다. 베모는 우선 바뚜불란 BATUBULAN이라는 곳까지만 간다고 한다. 거기서 덴파사르행 버스로 갈아 타고
다시 공항으로 가는 베모를 타면 이번 여행도 끝이 나는 것이다.


*위 사진 : 바뚜불란 베모 터미널

차창을 여니 아침의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창밖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풍경이겠지만
여행자에게는
늘 새로운 모습들이 상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좋고 나쁨에 대한 세상의 기준은 늘 변한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종종 상전이 벽해가 되기도 하고 도로변에서 흙먼지를 뒤집어 쓴 곡식이나 키우던
값어치 없던 자갈논이
어느 날 바로 그 위치 때문에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땅으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역마살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인가?
IMF 이전엔 한달에 20일씩은 출장을 다녀 해외 출장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한국 출장을 다닌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 옛날 장돌뱅이의 애환이 섞인 이 고단한
역마살 팔자를 두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종 '좋은 직업이네' 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내 스스로도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철없이 자랑하는 투로 말을 했다가 '장돌뱅이 역마살이
좋은 팔자라고 대접받는 세상은 되었다면 그 때문에 생긴 마누라 공방살은 어떻게 되는건데?' 하는
아내의 볼멘 소리를 들어야 했다.

딸아이는 대학에 들어가면 할 일이 너무 많아 아르바이트같은 것은 전혀 할 생각이 없으니 미안하지만
아빠가 돈을 좀 많이 벌어 달라고 부탁인지 협박인지를 자주 해댄다. 뭐가 그리 할 일이 많냐고 하니까
전공 외에 여러 가지 요리공부와 운동, 외국어 학습 등등으로 도저히 아르바이트로 부모의 어깨를 가볍게
해 줄 짬을 낼 수가 없겠다는 것이다.
방학 중에는 배낭 여행을 계획 중인데 지난 여름 울산의 친구 4명과
함께 대학생이 되면 여름 방학에 유럽쪽부터 둘러보자고 이미 의기투합을 했다고 한다.
철없는 딸아이 덕분에 허리가 휘게 생겼지만 그 이유 자체는 나무랄 때가 없어 보여 섭섭함을
눌러 두기로 했다.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남들이 다들 그러니까 대학입시를 치뤘던 것 같은데
딸아이는 무엇을 해보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여행을 계획에 넣은 것이 기특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세대와는 확연히 틀린 것 중의 하나가 여행이다. 내 능력만 된다면 학교를 한 두해쯤 휴학을 하고
여행을 하라고 비용을 마련해주고도 싶다.

   사랑의 격정은 삶을 정화하고
   자유는 거침없는 곳에서 오고
   인생은 광야처럼 비어있다

아직 '광야처럼 비어있는' 인생을 꿈꾸는 딸아이에게 항상 들려주고 싶은 백무산의 싯귀절이다.

그렇다. 여행은 늘 그렇다.
떠날 때는 내가 가본 곳보다 안가본 곳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산을 정복했다는
표현을 써서는 안되듯이 어느 한 지역에 대한 여행도 늘 진행형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신은 많은 일에 우리가 좀더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두었다.

'지진과 탱크'의 코를 골던 길동무, 아담한 빠당바이, 실망스런 짠디다사, 상업적 민속촌 발리아가, 찐드기 운전수,
아름다운 띠르따강가, 친절하고 수줍은 게데의 가족, 조용한 아메드 해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투계장의 닭과 야릇한
흥분으로 고함을 지르던 그곳 사람들, 부다클링 장터에서 가도가도를 팔던 주름살 깊은 할머니, 대장간에서 담금질을
하던 아저씨의 때묻은 작업복, 바비굴링을 있는 기야냐르의 시장의 번잡함 그리고 변화 속의 우붓.....

며칠 동안 머무르는 동안 발리는,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다녀가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감싸 주었다. 발자국을 찍고 추억을 얻은 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모습엔 기뻤고 실망스런 모습엔
마음이 아팠지만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 안에 담아 두고 싶다.

*2001년 9월 여행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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