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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맑고 깊은(潭) 햇살(陽)의 고장, 담양.

by 장돌뱅이. 2012. 4. 17.


*위 사진 : 담양의 대나무공원.

여름이 오면 아내는 늘 담양 명옥헌의 배롱나무를 이야기 한다.
팔년 전 여름 명옥헌을 찾아갔을 때 보았던 붉은 배롱나무 꽃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올해도 날이 더워지자 아내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 나는 올해는 여름이 가기 전에 기필코 담양의 명옥헌행을 실행하리라
마음 속에 숙제로 새겨 두었다.

이름처럼 햇살이 맑고 깊어 그럴까? 담양에는 대나무 숲이 많다.
우리나라 대밭 면적의 4분의 1이 담양에 집중되어 있다니 가히 우리나라의 대밭이라고
불러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전주에서 국도를 타고 순창을 거쳐 담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대나무골테마공원이라고 이름 붙여진 대나무 숲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 본
대나무 숲 중에 가장 깊고 서늘했다. 대나무 숲 사이를 걷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곳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 곳이었다.

대나무 숲에서 멀지 않은 메타세콰이어 숲길도 볼만한 곳이었다.
오래전 고속도로 건설 계획에 포함되어 자칫 사라질 위험에 처했을 때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살아남게 된 길이라고 한다. 보배로운 나무와 보배로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고장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나온다고 했던가.
아니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고장을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마침내 명옥헌에 도착했다. 근처에 널리 알려진 소쇄원이라는 원림이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지나쳤다. 좁은 언덕길과 마을길을 몇 구이 돌고 또 돌면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갑자기 눈앞이 붉은 색으로 가득해 지면서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한 여름 짙은 초록에 대비되어 더욱 강렬한 그 붉은 빛의 꽃은 바로 배롱나무꽃이다.
7월 경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벼가 익는 9월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여 100일 이상
꽃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화단에 심는 초본성 식물인 백일홍에 비교하여 배롱나무를
목백일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배롱나무는 중국 원산의 나무로 우리나라에서는 남쪽에서만
자랄 수 있다. 그 꽃색의 아름다움으로 옛부터 선조들의 사랑을 받아 건물이나 묘소 주변
혹은 선비들이 풍류를 읊는 곳에 이 나무가 심어졌다고 한다.

배롱나무꽃의 감동이 가라앉으면 비로소 명옥헌의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주차장에서 보면 정자는 풍성한 배롱나무꽃에 가려 반이 채 안보이고 우선 네모난 모양의
인공 연못을 보게 된다. 산기슭을 타고 내리는 계류를 끌어들여 연못의 물은 늘 맑다.
물속의 물풀이 들여다보이고 수면 위론 맑은 물에만 살 수 있다는 소금쟁이들의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이 부산하다.

연못 가운데 배롱나무가 심어진 작은 섬이 있다. 연못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배롱나무 가득한 언덕에 명옥헌이 자리하고 있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사방 난간이 둘러진 마루 속에 작은 방이 있는
정자이다. 원래 조선시대 광해군 시절 오희도라는 사람이 작은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내던 곳인데, 그의 아들 오명중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살면서 연못을 파고, 배롱나무를
심고, 언덕 위에 정자를 지어 명옥헌이라 이름을 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그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위치가 중요하니 정자를 올바르게
감상하는 것은 그 누마루에 걸터앉아 주변을 조용히 보는 것이라고 했다.
명옥헌에는 우리가 도시에서 흔히 보는 ‘마루에 올라가지 마시오’ 하는 금지팻말이 없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토록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
'금지와 거절'을 문화재에 대한 '관리와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한 다른 지역의 관리들이  
벤치마킹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편안히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언덕 아래 연못가에 펼쳐진 배롱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경관을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심지어 방안에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누마루에 오르니 산들바람이 시원했다. 아내와 딸아이는
어린아이들처럼 장난을 치며 즐거워했다. 이런 곳에 와서도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으리라.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만남' 이란 말, 그것이 건축 미학적으로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안에 든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8월의 명옥헌은
그  모범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그랬듯 저녁 해가 설핏할 때까지
자꾸 떠날 시간을 늦추어야 했다.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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