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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40 - 심호택의 「그 아궁이의 불빛」

by 장돌뱅이. 2016. 2. 9.

*이종구의 그림, 「활목할머니 」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리얼리즘의 복권전"을 아내와 관람했다.
80년대 민중미술이란 이름으로 낯이 익은 그림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중에「활목할머니」 - 이종구화가의 고향인 충청도 오지리의 실존 인물.
고향의 어린 시절 치맛자락으로 콧물을 닦아주시던 할머니 같은.
따뜻하고 아늑한 '그 아궁이의 불빛'같은.
그런 설날 연휴.

달아오른 알몸처럼
거룩한 노래처럼
그 아궁이의 불빛이 아직 환하다

푸른 안개자락 끌어덮은 간사짓벌
갈아엎은 논밭의 침묵 사이로
도랑물 하나 어깨를 추스르며 달아나고
기러기떼 왁자지껄 흘러갔다
목도리 칭칭 동여맨 아이들
저녁연기 오르는 집에 어서 가자고
재잘거리며 흩어진 하교길
진창에 엉긴 서릿발이
저문 달구지 바퀴에 강정처럼 부서질 때

짚검불이 숨죽이며 타오르는 부엌
불길의 혀에 가쁜 부뚜막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것 까마득히 모르는
멸치들이 시래기를 뒤집어쓰고 끓었다
토장국 냄새 맡으러
온동네 한바퀴 쏘다닌 바람
춥다춥다 사립문을 걸고 넘어질 때

너도 들어와 불 쬐고 가거라
홍시를 머금은 듯
활개치며 달아오르던
그 아궁이의 불빛이 아직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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