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예수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의 좌우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태오는 그들을 강도들이라 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그들의 이름이나 정체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예수처럼 그들도 정치범이었을 거라는 추측만 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앞둔 같은 처치이면서도 그들은 예수에 대해 비아냥거리고 모욕을 주었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루카복음서는 좀 더 자세하다. 둘 중의 하나가 예수에게 건넨 말을 기록한 것이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김동리는 그의 소설 『사반의 십자가』에서 이 부분을 소설가다운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소설 속에서 예수에게 말을 건넨 사람의 이름은 사반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에 폭력으로 저항한 혈맹단(血盟團)이라는비밀결사의 지도자였다.
사반은 예수가 생전에 보인 여러 이적(異蹟)에 주목했다.
사반은 예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수여"
"......"
예수는 대답이 없었다.
"임자는 메시아가 아닌가?"
사반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
예수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왜 표적을 보이지 않는가? 메시아의 표적을"
"그대는 일찍이 그것을 보지 못했던가?"
"지금이 그때다! 지금은 하늘의 권능을 보여야 한다!"
사반은 세상의 구원은커녕 "자신의 생명도 구하지 못하는 자"에게 "화가 버럭 치민다".
사반의 갈구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매가리' 없이 죽고 말았다.
사반이 예수에게 기대한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했던 사상이나 행적이 아니라
이적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적의 행위는 신적 권능의 한 표현일 뿐 종교의 본질이 될 수 없겠다.
종교 집회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이른바 신비함에 대한 '간증'은 저마다의 진심을 담은 것이겠지만
그에 대한 일반화나 집착은 '샤만적인 현실주의' 일뿐이다.
예수가 보인 가장 위대한 이적은 십자가에 못박힘 그 자체라고 한다.
불의에 대한 저항과 희생이야 말로 신성의 본질일 것이다.
솔직히 이 점, 생각이나 실천에 있어 나에게 매우 어려운 대목이다.
용산 일대의 천주교 성지에는 순교의 역사가 배여있다.
그 죽음의 의미 - 종교적, 현실적 의미는 무엇이며 그 둘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나는 아직 아는 바가 없다.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하늘의 존재에 대해 내겐 좀 더 많은 독서와 사색이 필요하다. 현장을 발을 직접 디뎌보는 답사가
그런 모색의 한 작은 방편이거나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1.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많은 사제들이 순교한 곳이라는 점이다.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분 가운데 열한 분이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외에 1801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 등이
이곳에서 참수를 당했다.
2. 당고개 순교성지
이곳은 아홉 분의 순교 성인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 복녀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곳이다.
빽빽한 아파트의 숲을 들어서면 성당과 그 윗쪽의 기념정원(?)이 나타난다.
3. 왜고개 성지
왜고개 성지는 현재 국군중앙성당 내에 있다.
위에 소개한 새남터와 당고개 성지는 솔직히 분위기가 조금 산만해 보였다.
새남터의 성당은 한옥의 외형을 지녔지만 어디선가 황비홍이 갑자기 뛰쳐 오르거나
대형 음식점의 조리 냄새가 풍길 것 같았다. 건물 외벽의 색감도 정갈한 맛이 부족해 보였다.
당고개 성지는 입구부터 장식 과잉인 곳이었다.
너무 많은 그러나 그다지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 기교가 어지럽게 느껴졌다.
성지는 정갈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기본이고 건물이나 장식도 거기에
맞추어져야 한다면 새남터와 당고개는 모두 조금씩 부족해 보였다.
이 글에 앞서 방문한 원효로 성당에서 보듯 권위는 규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움은 들뜬 장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에 비해 왜고개 성지는 소담스러운 곳이었다.
초록의 나무들이 가득한 작은 언덕에 십자가 상과 순교자의 비석이 있는 단촐한 모습이었다.
그 앞에는 친절하게도 벤치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엄숙함하면서도 다정한 곳. 그래서 머물고 싶은 곳. 성지도 성당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내와 나는 그 벤치에 앉아 기도와 멍때리기를 했다.
4. 박종철기념관
박종철기념관은 용산에서 멀지 않는 남영역 근처 경찰청 인권센터 안에 있다.
원래는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시커먼 벽돌과 작은 창문의 건물이 지금도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곳 509호실이 박종철군이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으로 살해된 곳이다.
박종철의 나이 스물 한 살. 1987년 1월14일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수배 중인 선배의 소재를 말하라는 것이 연행과 고문의 이유였다.
(아내는 차마 이 현장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처음엔 수사관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경찰은 발표를 했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그해 장엄한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 치니까
'억'하고 쓰러져 숨졌다?
종철아,
네가 모른다고 책상을 '탁' 치니까
아저씨께선
'억'하고 쓰러져서 운명하시고
너는 이렇게 살아남았는냐?
-조태일의 시, 「짧은 시」 -
조태일의 시처럼 우린 "아저씨께선 '억' 하고 쓰러져서 운명하시고 "박종철은 살아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박종철의 죽음으로 부터 20여 년이 지난 2009년 1월20일 새벽 우리는 용산에서 재개발 문제로 농성중이던
철거민 다섯명이 목숨을 잃은 참극을 목격했다. 사건의 배경과 전개의 개략은 모두들 알고 있는 일일 것이다.
국가의 실체는 가장 어려운 사안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내세우고 지키는 입장과 태도에서 그 정체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하겠다.
청년 박종철에게 그리고 용산 참사에서 국가는 무슨 행동을 했고 어떤 입장을 견지했던가?
기억해야 할 일이다.
용산의 양민들이 죽어 냉동고에 갇히고 유족들의 절규가 거듭하여 경찰 폭력의 타깃이 되고 살아서 망루를 내려온
이들의 인생에 법의 이름으로 5년, 6년 저주의 낙인이 찍히던 300여 일 동안, 국가의 한결같은 대응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란 것이 되었는데도 공동체를 지배하는 어두운 힘이 그 '사람 자격증'의 효력을 부인할 때,
규범은 깡패의 가당찮은 수칙과 무엇이 다르고 국가는 백주의 도적 떼와 어떻게 구별되는지 알 수 없다.
- 이영광 시인의 글, 「사람이란 것에 도달하기」중에서 -
5. 옛집 국수
용산이나 삼각지 근처에 가면 아내와 함께 꼭 들리는 식당이다.
국수를 담아내는 맑은 멸치육수의 맛이 깔끔하고 구수하다.
물국수(온국수) 한그릇의 가격이 3천원. 김밥 한 줄은 1500원.
국수 두 그릇에 김밥 한 줄로 아내와 난 배가 한가득이 된다.
이쯤 되면 거래가 아니라 공양을 받는 기분이다.
선한 인상의 주인 아주머니에게 값을 지불하며
"감사합니다. 아내와 제가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식당이에요."라고 하자
"저희가 감사하죠. 힘이 됩니다. " 라고 조용히 받는다.
그 겸손함에 과장이 없다.
예전엔 좌석이 열개 미만으로 아주 작았는데 미국에 다녀오는 십년 사이에
확장하여 실내 공간이 넓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크지 않은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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