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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영화 「자백」 시사회

by 장돌뱅이. 2016. 9. 24.







아내와 서울극장에서 있었던 다큐멘타리 영화 「자백」 시사회에 다녀왔다.
본격 개봉은 10월13일에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맑고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사회의 어둡고 끔찍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미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가 되어버려 포스터만으로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야만 프렌들리'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으므로 영화가 보여주는
고통과 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터 속 '액션 블록버스터 저널리즘'이라는 문구에
'공포·유령의 현실'이라는 말을 덧붙여 보기도 하면서.
아니 '블랙코미디'가 더 어울릴까?
영화를 보면서 씁쓸한 헛읏음을 여러 번 터뜨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영화를 보고 돌아오면서 아주 아주 오래 전 프랑스에 있었던 한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

일명 "드레퓌스(ALFRED DREYFUS) 사건."

1894년 12월 프랑스 육군 군법 회의는 육군 대위 드레퓌스에게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는 국가기밀을 적국 독일에게 넘겼다는 간첩 혐의로 두 달 전 체포된 상태였다.
드레피스는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사가 논거로 삼은 것은 증거에 바탕을 두지 않는 자기 주장뿐이었다.
"검사는 드레퓌스의 필적과 증거의 필적이 다른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드레퓌스가 다른 필적을
가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드레퓌스의 집을 뒤지고 그의 전력을 샅샅이 조사했는데도
역시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것은 드레퓌스가 범죄를 은폐하는 데 천재적인 조심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드레퓌스가 지루한 심문과정에서도 단 한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영리할 뿐 아니라 초범죄자적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검사는 주장했다.
보통의 범죄자라면 경찰에서 심문을 당하면 양심이 되살아 나는 법인데
드레퓌스는 이런 양심이 결핍돼 있는 도덕적 불구자라는 것이었다."(위 사진 속의 책 중에서)

드레피스의 무죄와 진범이 밝혀졌지만 군부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범에게 무죄를 선고하기까지 했다. 드레퓌스가 유태계였으므로 반유태계 신문은
선동적인 기사로 일관했다. 카톨릭계 우파, 왕정주의자들도 이에 가세하였다.
이들은 드레퓌스를 사형시키고 유태인들을 군과 공직에서 모두 추방시키라고 부르짖었다.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계급적 시각'에서 침묵하고 냉소했다.

인종적 편견, 광기, 눈먼 애국심, 기괴한 상상력, 몇몇 장교와 장성들의 사욕에
진실은 위축되고 그 자리는 '군의 명예와 국가 이익'이라는 거대 논리로 덧칠이 되었다.

양식 있는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정직과 용기가 이에 맞섰다. 
그들은 드레퓌스의 무고함을 알렸고 마침내 프랑스를 허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냈다.

조르쥬 끌레망소는 드레퓌스를 위해 무려 800편에 달하는 글을 썼다.

   국가이익 - 그것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법에 관해 말하지 말라.
   자의적인 권력이 법을 대신할 것이다. 오늘 그것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이며, 국가 이익은 이성을 잃은 채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채 쳐다만 볼 것이다.
   정권이 국가이익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 사람의 차이를 허용치 않고 차이를 감내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드레퓌스에게 적용된다면,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적용될 게 분명하다.
   새시대의 동이 터올 때, 대혁명이 보인 첫 행동은 국가이익의 저 거대한 요새, 바스티유를 쳐부수는 것이었다.


1898년 1월 13일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당시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그는 작가적 호기심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접했으나 그의 결백을 확신하면서 진실을 지키는 싸움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자기 얼굴에 낙인을 찍었고, 역사는 이같은 사회적 죄악이 저질러진 것이 귀하의 통치기간 중이었음을 기록할 것입니다.
   그들이 감히 도전하였으니 나 역시 도전해야겠습니다. 정식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 사법부가 충분하고 순수하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 그렇게 맹세하였기에 진실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임무는 말하는 것이며 공범자가 될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고문을 겪으며 결코 저지르지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무고한 사람의 유령이 밤이면 나타나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궁극적인 숭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장래에 가장 먼 곳까지 재앙을 미치게 할 지뢰를 매설했는지 아닌지를

에밀 졸라의 글은 국내외적으로 폭발적인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대규모 시위 군중들은 "졸라와 유태인을 죽여라!"고 소리를 쳤다.
동시에 많은 지식인들은 졸라에게 찬사를 보내고 지지를 선언했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등의 대학에서도 정의를 향한 졸라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에밀 졸라를 중상죄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도 굽힘이 없었다.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나는 맹세코 주장합니다. 나의 생애와 명예를 걸고 확언합니다. 이 엄숙한 순간, 이 법정 앞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당신들과 배심원 앞에서, 프랑스 앞에서, 드레퓌스의 결백을 나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나의 작가 생활
   40년과 필생의 작업으로 힉득한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언합니다. 내가 얻은 것, 내가 획득한 명성,
   프랑스 문학의 성장에 기여한 내 작품, 이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결백함을 맹세합니다. 드레퓌스가 결백하지 않다면,
   신이여! 내가 이룬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작품이 잊혀지도록 하소서! 드레퓌스는 무죄입니다. 

그러나 에밀 졸라는 끝내 징역1년의 유죄를 선고 받았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드레퓌스가 1906년 무죄가 확정되어 군에 복귀했다. 12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참다운 의미의 프랑스혁명은 이때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에밀 졸라는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가 죽은 뒤 4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영화 「자백」은 우리 사회가 지금 프랑스의 21세기와 같은 시대를 지나고 있는가 묻는다.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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