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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라스푸틴의 귀환

by 장돌뱅이. 2016. 10. 28.

*라스푸틴(Grigori Rasputin)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에 독일군과 전투에서 사기가 높았던 러시아군은 개전 1년이 지나지 않아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1915년 전반기까지 러시아 군대의 전사자는 151,000명, 부상자는 683,000명, 포로가 된 병사가 895,000명에 이르렀다. 국내 행정이 엉망이어서 군수물자를 제때에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의 궁정은 라스푸틴의 '검은 힘'의 결정적인 지배 아래 철저히 농락되고 있었다. 라스푸틴은 황제와 황후 - 특히 황후를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었다. 라스푸틴의 기도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 황후는 그녀의 모든 희망을 라스푸틴에게 집중시켰고 라스푸틴을 연모(戀慕)와 같은 감정으로 대했다.

하여 라스푸틴이 온갖 음탕한 짓과 전횡을 일삼아도 감히 견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러시아가 독일에게 망할 것이 아니라 이 시베리아의 돌중놈 손에 망하겠구나"는 탄식이 도처에서 나왔다. 정부 고관의 자리도 라스푸틴이 떼었다 붙였다 하였다. 러시아군 총사령관이며 황제인 니콜라스 2세의 숙부인 니콜라스 대공(大公)도 라스푸틴의 입김으로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라스푸틴을 제거하려 하다가 실패했던 것이다.

황제는 숙부를 대신해 직접 총사령관으로 직접 전선으로 나갔지만 그는 궁에서도 전장에서도 무능하고 '골 빈' 지도자였을 뿐이었다. 그의 출전으로 조정은 더욱 철저히 라스푸틴에게 농락되었다. 황후는 반발하는 대신들에게 "우리의 친구(Our Friend)라고 항상 대문자로 표기했다) 라스푸틴에게 복종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뿐 아니다. 라스푸틴의 '작전 지시'를 그대로 황제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황제는 이에 따랐다.

 "우리의 친구는 너무 고집 세게 진격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너무 고집 세게 진격하면 손해가 너무 클 것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가 밤에 계시를 받았는데, 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고 한답니다."
"우리가 카스피안 산맥으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우리의 친구는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의 말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일단의 젊은 귀족들 사이에 라스푸틴의 암살을 위한 모의가 무르익었다. 1916년 12월 라스푸틴을 식사에 초대하여 음식에 독을 넣어 독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계획대로 독이든 과자와 술을 먹은 라스푸틴은 미동도 없이 두 시간이 넘게 계속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겁에 질린 암살자'는 마침내 총으로 라스푸틴을 쏘았다. 그러나 라스푸틴은 여전히 죽지 않고 뛰쳐나가 암살자는 다시 총을 쏘아야 했다. 그리고 밧줄로 전신을 묶어 얼음을 깨고 강물 속으로 집어넣었다. 사흘 뒤 시체가 발견되어 검시를 했는데, 사인은 독살도 총살도 아닌 익사였다.

라스푸틴이 죽고 난 이듬해인 1917년 2월 대규모의 민중 봉기로 황제는 퇴위하였고 300년 이상 존속하던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하였다. 라스푸틴은 1911년 황후 알렉산드라를 통해 황제에게 "전쟁과 더불어 러시아와 당신들의 최후가 올 것이며 당신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를 모두 잃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우습게도 이 예언은 적중한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의 죽음도 사전에 예견한 바 있다.

-이상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문학과 지성사, 1979년판)』에서 발췌 정리-

라스푸틴······
100년이 지난 뒤에 그의 여전한 건재를 러시아가 아닌 우리 땅에서 확인하게 되니 놀랍다. 국민이 뽑은 지도자가 자신의 의무를 또 다른 모습의 '라스푸틴'에게 일임하고 방기함으로써 국정 운영의 파탄을 초래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그의 귀환에 일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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