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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버티고 VERTIGO 에서 노래 부르다.

by 장돌뱅이. 2012. 4. 19.

여행짐을 꾸릴 때 나는 ‘가급적 간단하게’ 주의자였다.
식구들에게도 그것을 권했다. 강요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라나?
간단하게 말해서 훌훌 털고 떠나는 게 여행이니 티셔츠에 반반지 몇 개면
충분하지, 선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넥타이나 롱스커트, 뾰족구두가 웬 말이냔 거였다.
여행짐은 많을수록 좋다는 사람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위 사진 : 식당 버티고의 야경.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장소에 따라선 그 장소에 어울리는 준비를 하는 것이 그 곳과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의
어떤 ‘격’ 같은 것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많은 부분이 형식에
의해 규정되고, 형식이 가식이 아닌 이상 어떤 시간과 장소에 바치는 정성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물론 이제까지 최소한도의 드레스코드를 갖추어서 어디서든 그 때문에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것은 정말 최소한도의 준비였던 것이다.

방콕의 반얀트리 호텔 61층에 오픈에어 레스토랑인 버티고를 다녀오면서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다. 그곳에는 여행자임이 분명한 많은 사람들이 정장 차림으로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더 이상 미련하게 보이지 않고 멋쟁이로 느껴졌던 것은
아내의 표현처럼 가히 '혁명적인 내 사고의 변화'때문이리라.

사치를 부리자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가지고 있는 한두 벌의 옷과  한두 개의 장식을
추가로 여행지에 가져오는 수고로움에 너무 인색할  필요는 없겠다.
버티고의 분위기는 나같은 천둥벌거숭이 촌놈에게마저도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61층의 고공에서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별밭 같은 야경, 감미로운 와인과 음식.
구름을 걷히자 드러나는 맑은 하늘과 달.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세상살이의 모든 걱정이 그 순간만큼은 함께 걷히는 듯 했다.
기분좋게 술이 취하면 내가 하는 유치찬란한 짓 - 아내의 손을 잡고 노래 부르는 것.
버티고에선 분위기에 취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옛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 날은 아내도 그런 나의 주책을 크게 탓하지 않았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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