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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태국

지난 여행기 - 2001방콕·푸켓·끄라비1

by 장돌뱅이. 2017. 9. 10.

1. 9와 3/4번’ 승강장으로 들어가며

크리스마스 아침의 올림픽대로는 한산했다.
나를 태운 리무진 버스는 오래간만에 내보는 제 속도에 흥겨운 듯 유유한 한강의 흐름을
앞질러 가볍게 달려갔다.
평소 한시간 걸리는 거리를 세시간 걸려 다녀 올 정도로 차량들의
홍수를 이루었던 지난 밤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서울의 길이 이렇게 크고 넓을 때도 있구나!
행주대교를 지나면서 버스는 한강을 버리고 텅 빈 들판을 끼고 달렸다.

차창으로 햇빛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늑한 졸려움이 밀려왔다.

우여곡절 끝에 '나홀로 여행'이 되었다.
급작스런 친구들과의 가족동반 여행계획이 연말이라는 빠듯한 항공권 사정으로 무산되고 
다행히 예약이 되었던 우리 가족만의 여행도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겪는 입시 준비라는 
굴레를 딸아이가 거부하지 못 하였고
아내도 덩달아 포기를 하였다. 
결국  예약보다 힘들게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태국에서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을 가진
나만 홀로 길을 나서게 되었다. 아내가 내게 허락해 준 선물의 여행이기도 했다.

여행 가방을 꾸리는 것을 지켜보던 딸아이는 이번 여행 기간 동안에는 해리포터를
읽으라며 4권의 책을 가방 속에 밀어 넣어 주었다.

그동안 나는 헤리포터를 먼저 읽은 딸아이와 아내와의 대화에서 종종 ‘왕따’를 당해왔다.
머글, 호그와트, 헤그리드, 덤블도어, 퀴디치 게임 등등.
아내와 딸아이는 종종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들을 주고 받으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는 어리둥절한 나의 표정을 즐기곤 했었다.


성미 고약한 ‘머글’(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인 이모부 집에서 자신이 특별한 마법사인
줄도 모르고 자란 헤
리포터는 어느 날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되고 드디어 마법사의 학교인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된다.

그 기차는 머글들의 기차역에서 출발하지만 9번 승강장도 아니고 10번도 아닌 9와 3/4번 승강장에서 출발하는 기차였다.
헤리포터의 이모부는 ‘그런 번호의 승강장은 없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9번과 10번 사이의 벽을 향해 과감히 달려간
해리포터의 앞으로 없던 문이 열리고 마법의 세계로 가는 기차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기차에 오르면서 환상적이면서도 파란만장한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9번 다음에 10번 밖에 없는 '머글'의 일상은 정해진 규칙이고 기계적이다. 짧고 단편적이다. 
해서 일상의
 가쁜 숨을 고르고 가끔씩 평소의 보폭보다 반 발자국만 작게 걸어도
9번과 10번의 일상 사이에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이 보인다는 것을 잊고 지낸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이루려하는 많은 욕망들은 그런 ‘마법의 통로‘로 들어가기만 하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한다.

몽롱한 잠결 속에서 차창 밖으로 들판이 지나고 다리가 지나고 바다가 지났다.
멀리 흰색의 인천공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거기 어딘가 ‘9와 3/4번 승강장’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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