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대학에 입학한 후 어느 날 우리 과에 한 '인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단과대 전체 차석(次席)이며 계열 수석 입학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보다 공부 잘하는 '놈'들이야 늘 있어 왔기에 나는 그가 누구인지 특별히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인물'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화학 실험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날이었다. 노느라 바빠 숙제를 안 해 간 나는 옆에 있는 아무에게나 리포트 좀 빌려달라고 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몇몇을 빼곤 아직 이름도 잘 모를 때였다. 적당히 보고 베낄 속셈이었다.
"리포트 해왔으면 잠시 빌려줄래?"
말을 건네자 상대방이 머뭇거렸다.
"빌려주긴 하겠는데 ······ 베끼기가 좀······ 뭐 할 거 같아서······"
"똑같이 안 베끼고 적당히 알아서 할게."
나는 속으로 '짜식, 통 크게 생겨가지고 쪼잔하긴'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가 마지못한 듯 건네주는 리포트의 첫 장을 넘기다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뭐야? 이거?!'
사실 교양학부의 실험이라는 것이 간단한 것이라 보통 두세 장의 내용에 표지만 그럴듯하게 붙여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 실험적 결과 이외에 미분을 적용한 이론적 고찰의 내용을 서른 장 가까이 덧붙여 놓고 있었다. 그것도 돼먹지 못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영어로. (얼마 뒤 그의 하숙방에서 책상 위에 펼쳐진 존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 원서를 보고 더욱 기가 죽었다.)
그러나 학구파로서의 그의 존재감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다른 공부에 매진을 하는 듯했다.
유신과 긴급조치라는 불온한 시대에 대항하는 불온한 공부. 그의 수업 출석이 불규칙해지고 점점 뜸해져 갔다. 그를 주시하던 정보 기관은 그의 고향에까지 찾아가 그가 불온한 사상에 물들었다며 부모님을 협박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현역 군인들이 교내에 상주하며 교련 과목을 가르쳤다. 1학점임에도 시간 배정은 주당 4시간이었다. 대신 1학년을 마치면 2개월의 군 복무 혜택이 있었다. 3학년까지 교련 수업이 있었으므로 총 6개월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면제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대신에 교련 학점이 '빵꾸'가 나면 다음 학기에는 강제 징집이 된다는 채찍도 있었다. 그는 당연히(?) 교련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여 '빵꾸'를 자청했고 징집되었다.
'한 여자가 주는 실연으로 꼬박 사흘을 굶은 적은 있어도 암운의 조국과 민족 때문에는 한 끼도 굶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어쩌다 그와 가까워졌는지는 미스터리이다. 그와 가까워진 나 이외에 다른 두 명의 진지·성실한 친구들은 공유의 부분이 컸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술을 빼곤 가까워질 수 있는 어떤 공통점이 없었다.
아무튼 나중엔 4명이서 학과 공부 아닌 다른 공부를 해보자고 거창한 이름의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한두 번인가 모임을 한 뒤론 책은 뒷전이 되고 술이 교재가 되고 말았지만.
그로부터 소개받은 이런저런 책들은 철부지였던 내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만들어 주었다.
이젠 고전이 된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비롯하여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님 웨일스의 『아리랑』, 잉게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내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악전고투를 하며 읽었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PEDAGOGY OF THE OPPRESSED(페다고지)』 등등.
그가 건네준 김지하의 시집 『황토』는 절절했고, 담시 「오적」의 풍자는 통렬했다. 철필로 긁고 등사기로 밀어만든 필사본이었다. 당시 김지하는 유신 정권의 폭압에 맞선 강렬한 투사이자 상징이었고 전설이었다. 김지하의 모든 시집은 출판과 판매가 금지되어 일반인들은 접하기가 쉬지 않았고 그의 문학에 대한 논의는커녕 그의 이름조차 불온시되었다. 요즈음의 김지하로 그 시절의 김지하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을 하면서 그와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했다. 군 시절 폭력을 행사하는 장교에게 '육군 규정대로 하라'고 항의를 했다가 '육군 규정대로' 영창에도 다녀왔다고 씩씩하게 말하며 웃었다. 그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을 연구하는 무슨 모임에 나간다고 했고 나를 데려가 소개하기도 했다.
그 뒤 나의 결혼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그는 점차 친구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한두 번인가 내가 근무하는 지방으로 찾아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핸드폰이나 이메일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한번 선이 끊어지면 연결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서울 출신이 아닌 본가가 지방에 있는 유학생이었으므로 내가 알고 있는 연락처는 그의 하숙집뿐이었다.
세월이 빠르게 30년이 지났다. 나를 포함해 남은 친구 3명은 가끔씩 술잔을 기울일 때 그의 소식을 궁금해하곤 했다. 국회의원 보좌관 정도로 정치에 끈을 달고 있거나 아니면 재주가 많으니 '개과천선' 해서 열공으로 학위를 따내 어느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 보기도 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그를 만났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미국에 주재하고 있을 때였다. 충남 대덕의 한 연구소에 있는 그 친구가 무슨 일로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우연히 그걸 본 그가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입시 학원 강사, 그의 표현대로 '할아버지 강사'가 되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부평 등지의 공단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 운동을 하다가 속절없는 세월에 떠밀리고 포도청인 목구멍을 따라 어쩔 수 없이 학원강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기 강사여서 제법 돈도 모았지만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면서 다시 강사로 살아왔다고 했다. 개인적인 능력은 탁월했지만 이익 창출에 매달려야 하는 사업은 애초에 그와 맞지 않는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돌아와 그와 만났다. 우리가 '아이러브스쿨' 같은 것을 통해 그를 찾으려 했던 것처럼 그 역시 내가 다니던 회사를 통해 나를 찾아보려고 몇 차례 시도했었다고 한다. 아마 내가 해외에 나갔을 때라 연락이 닿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예전처럼 술을 마셨다. 그는 술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한때 노동문제 '전공'이었던 그가 노동의 댓가인 알량한 강사료마저 떼일 정도로 영악스러워진 세상에 염증을 느끼는 듯했다. 거기에 사업 실패와 그 때문에 꼬인 가정사로인한 상처와 좌절도 있어 보였다.
올봄 그가 시골로 내려가 딸기 농사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할아버지 강사'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고. 그동안 많이 버틴 거라고.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친구들은 십시일반으로 '딸기 펀드'를 만들어 그를 응원했다.
"시골서 월 백만 원 수입만 있으면 살지 않겠냐?"
그가 서울을 떠나며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이 40 이후의 얼굴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우리 사회가 온전했다면 젊은 시절의 그는 빼어난 재능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대의 고통을 오래 품으려 했던 아름다운 투신 끝에 남은 그의 고단한 노후가 안타까울 뿐이다.
강물은 이제 범람을 모른다
좌절한 좌파처럼 추억의 한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크게 울지 않는다
내면 다스리는 자제력 갖게 된 이후
그의 표정은 늘 한결같다
그의 성난 울음 여러 번 세상 크게 들었다
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약발 떨어진 신화
그의 분노 더 이상 저 두껍고 높은
시멘트둑 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오늘 권태의 얼굴을 하고 높낮이 없이
저렇듯 고요한 평상심, 일정한 보폭 옮기고 있다
누구도 그에게서 지혜를 읽지 않는다
손, 발톱 빠지고 부숭부숭 부은 얼굴
신음만 깊어가는, 우리에 갇힌 짐승 마주 대하며
늦은 밤 강변에 나온 불면의 사내
연민, 회한도 없이 가래 뱉고 침을 뱉는다
생활은 거듭 정직한 자를 울린다
어제의 광영 몇 줄 장식적 수사로 남아 있을 뿐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하지 못한다 그 어떤 징후,
예감도 없이 강물은 흐르고 꿈도 없이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찬란한 야경 품에 안은 강물은
저를 감추지 못하고 다만, 제도의 모범생이 되어 순응의 시간을 흐르고 있다
- 이재무의 시,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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