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31 - 창신동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by 장돌뱅이. 2018. 6. 24.





연말까지 동대문 근처에서 일주일에 이틀은 보내야 할 것 같다.
서울시에서 하는 "보람일자리" 중 내가 맡은 장소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평화시장 일대나 창신동 언덕길의 좁은 골목골목에는 서울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70년식' 풍경이 오롯이 살아 있다.
다만 그때에는 없었던 네팔음식점과 환전소 등은 다문화로 변해가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사회 곳곳이 몸살을 앓는 개발이라는 북새통에서 왜 이곳은 제자리 걸음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방인'인 나는 그 낙후된 풍경에서 느껴지는 어떤 편안함과 따뜻함이 좋아 점심 시간이나 오전에 일이
끝나는 날에 두세 시간씩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며 '시간여행'을 해보곤 한다.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동대문1호선역 3번 출구를 나와 200미터쯤 직진하다보면 왼편으로 꺽어지는 비탈길 바닥에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백남준"이라는 흰 글씨가 커다랗게 써 있다.
글씨를 따라가면  "백남준을...집"에 닿게 된다.

처음엔 혼자서, 그리고 이어서 친구들과, 다음엔 아내와 창신동에 있는 "백남준을...집"에 가보았다.

세 번씩 가볼만한 곳은 아니었으나 사무실에서 가깝고 "백남준을...집" 안에
주민들이 운영하는 조용한 커피점이 붙어 있어 겸사겸사 가보게 되었다. 

백남준의 예술에 대해 나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없다.
1984년 새해 벽두에 텔레비젼 방송에서 느닷없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생중계 하면서
백남준이라는 이름 앞에 '세계적'이니 '거장'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이고
당시로서는 생경한 '비디오 아티스트'의 대가라고 하며 요란을 떨어준 덕에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 
그때 호기심에 '뭐지?' 하고 잠깐 보았지만 무엇인지 내용도 의미도 알 수 없어 이내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1984년'이라는 한국 상황에서는 먼 안드로메다 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을 얼핏했던 것 같다.

당시에 '1984년'과 '오웰'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영국의 소설가 조지오웰과 그의 작품 『1984』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소설 속 독재 권력 '빅브라더'와 1984년 우리 현실 속 '빅 브라더'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백남준의 작품은 이런 것과 상관없겠지만(정확히는 상관있는지 없는지 내가 모르지만.)
그때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덕분에 미루어 두었던 소설 『1984』을 읽어보게 되었다.
백남준이라는 이름과 소설 『1984』 속의 한 귀절은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미래를 향해, 과거를 향해, 사고가 자유롭고 저마다의 개성이 다를 수 있으며 혼자 고독하게
   살지 않는 시대를 향해, 진실이 존재하고 일단 이루어진 것은 없어질 수 없는 시대를 향해.


   획일적인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 축복이 있기를

 






   내가 백남준의 말에서 감동한 것은 말하는 방법의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이다.
   그의 말에 찬성하건 안 하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거나 보고 있으면 즐겁다.
   그 즐거움은 그가 비억압적으로 말하고 있는 데서 생겨나는 즐거움이다.
   (···) 백남준이 말하는 방식은 진솔하고 힘있다. 그는 옳은 소리를 억압적으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옳은 소리만을 목청 높여 말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은 웍압적이다. 다시 말해 위선적이다.
   (···) 나는 누구나 비억압적으로 말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 다시 말해 백남준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내가 꾸는 예술의 꿈이다.

                                                   
전시장에 붙어 있는 김현의 글(「백남준 방식의 말」 『중앙일보』 1984.7.7.)이다.
나는 언제 백남준처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으로 읽었다.



백남준과 백남준의 예술을 몰라도 동대문 근처에 있다면 "백남준을...집"은 잠깐 들러볼만 하다.
예쁜 한옥과 정갈한 전시, 그리고 한적한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카페는 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한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안내를 해주는 젋은 여성 직원도 친절하기 그지 없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