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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일본

오키나와3 - 슈리성 공원

by 장돌뱅이. 2018. 11. 28.

오키나와 소바 (そば)
소바하면 메밀국수를 무·파·고추냉이를 넣은  뜨겁거나 차가운 간장에 찍어먹는 것을 떠올리지만
오키나와 소바는 밀가루로 면을 만들어 돼지 뼈와 가다랑어포를 우린 육수에 말아먹는 것을 말한다.
지역별로 면 굵기와 모양, 고명도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삼겹살 조림, 어묵 파 등이 기본 고명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모노레일 슈리역에서 슈리성을 가는 길목에 있는 식당 "슈리소바 (首里そば)"에서 오키나와 소바를 먹었다.
돼지뼈 육수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맑고 담백한 맛의 육수가 면과 일체감을 이루었다.
오키나와 전통술인 아와모리(盛)에 고추를 담궈 만든 소스 고레구스를 넣어 먹으니 더욱 입에 붙었다.


'일본인 듯 일본 아닌 일본 같은 - 오키나와.'
표현상 어폐가 있지만 대중 가요를 빌려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를 규정하면 대충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약 450 년간 존속한 류쿠 왕국과 그 이후의 역사를 대충 알아보다 문득 떠오른 표현이다.


*위 사진 : 천녀교

1429년 오키나와를 통일하며 슈리성에서 본격적인 창업을 한 이래 류쿠왕국은 중국, 조선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활발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조선과는 14세기 말부터 교역을 해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류쿠 왕국의 나하에 대해 '시장이 열리고 수많은 아시아 상인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라고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조선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유적이 슈리성으로 오르는 길 한편에 있었다. 
15세기 말에 조선의 왕으로부터 불경을 받아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1502년에 지었다는 당집과 덴녀바시(天女橋)라는
이름의 다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
류쿠는 중국과 바쿠후(幕府)의 속국으로 가운데 끼워져서 살아가야 했다. 중국은 체면상 책봉이나 조공 체제의
형식적인 유지에만 관
심이 있는 의례적인 관계였지만 우치나(오키나와)를 포함한 주변 섬들의 지배권을 위임받은
사츠마한(摩藩)은 뒤에 숨어서 슈리 왕부의 통치력을 조종했고 세금과 공납을 통하여 류쿠를 수탈했다. 쇼군(將軍)이나
국왕이 바뀌 때에는 경축과 사은 사절이 에도(江戶
)에 가야 했다. 사츠마한은 이미 17세기 초에 바쿠후로부터 류쿠 침공
허가를 받아 단 일주일만에 무력으로 류쿠왕국을 접수했다. 
그러나 류쿠로 하여금 겉으로는 형식적인 왕국을 유지하도록 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중요했던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유지시키기 위해서였다. 또 류쿠인이 일본식 풍속을 따르는 것을 금지하고,
중국 사절이 올 때에는 나하에 체류하던 시츠마 관리를 잠시 피해 있도록 했다."

(위 " "안의 인용 출처는 황석영의 소설 『심청』)

바후쿠 다음에 등장한 메이지 정부는 1879년 오키나와로 쳐들어와 류쿠왕국을 종식 시키고 일본에 강제 편입 시켰다. 
이를 '류쿠처분(琉球處分)'이라고 한다. 슈리성엔 일본 군대가 머물렀고 류쿠어는 사용 금지가 되었다.
또한 오키나와 사람들은 모두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의 겪게 된다. '총알 비(鉄の이른바 '옥쇄'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의 희생을 강요하었고
미군은 수만 발의 폭탄을 투하하여 슈리성을 비롯한 오키나와의 많은 것을 처참하게 파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오키나와는 미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오키나와는
미군 기지로서의 역활을 맡기도 했다. 오키나와는
1972년에 일본에 귀속되었다. 
오키나와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의 고비마다 원주민들의 의견은 자주 묵살되었다.
지금도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일본 본토의 역사 왜곡에 대한 오키나와인들의 항의와 농성이 계속되고 있다.

오키나와 동요 중에 "빨리 숨어!"라는 노래가 있다. 오키나와 아이들이 까마귀에 빗대어 메이지 시대 본토 일본인의
위협에 처한 자신들의 상황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어이 까마귀야/본토 사람이/총을 메고서/널 잡으러/왔어./판타누스 숲으로/소철 숲으로/빨리./빨리빨리."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郎)는 "이 노래가 고발한 상황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오키나와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슈리성공원( 슈리조코엔)
슈리성을 두 시간 정도 산책하듯 천천히 돌아보았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느낌의 궁전이었다.
정전에 이르기까지 돌담과 돌계단의 구성이 아기자기해 보였다.
아내와 사진을 찍으며 의미와 내력을  알지 못하는 여러 종류의 문을 통과하고 성벽을 따라 걸어 다녔다.
나하시 최고의 관광지답게 성안 어디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에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와 상관없이 언제나 둘만이 있는 듯한 고요함과 한적함이 있다. 슈리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에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소설 『심청』에 슈리성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주인공이 슈리성의 정문인 슈레이몬(守禮門)을 지나 정전에 드는 장면이다.
대가(大家)의 글을 요약·인용하고 나의 사진 몇장을 첨부하는 것으로 슈리성 설명을 대신한다.  


 숲 사이로돌을 깔아놓은 오르막길이 계속되다가 붉은 기둥 네 개로 받친 이층 기와지붕의 수례문(守禮門
)이 나왔다. 
다시 위로 오르니 슈리 성의 돌로 쌓은 성벽이 나타났다. 성문을 지나 다시 궁성 안쪽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성벽으로
이어진 돌계단을 올
라가니 누각을 올려놓은 듯한 문이 있었다. 그곳은 이미 궁성 내부로 왼편의 용못과 후원으로
이어
지는 한적한 곳이었다. 다시 옆으로 돌아서 문을 하나 더 통과하고 나서야 궁전의 정면 문이 나왔다.

궁정의 아래 뜨락에 당도하니 화려한 궁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궁전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기둥에서 벽과 지붕의 기와에
이르기까
지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섰는 궁전은 온통 자줏빛인데 처마 밑의 막새기의 끝과 들보의 끝만 금색으로 반짝였다.
지붕읙 골
마루는 하얀 회로 발라서 지붕의 곡선이 더욱 뚜렷해 보였다. 정전(正殿)으로 들어가는 붉은 대문은 봉신문(奉神門)
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어정(御庭)의 아름다움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바닥은 온통 붉고 흰 전돌로 장식되어 있었고 정전을
둘러싼 건물마다 금빛 난간이 둘려 있었다. 


 정전은 그야말로 바다의 왕국답게 용궁처럼 보였다. 일층은 정면 좌우로 길게
벌린 것 같았는데 정중앙에 두 겹의 지붕이
높직하게 올려다보였다. 맨 꼭대기의 용마루에는 황금의 용 머리가 푸른 색 뿔을 세우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붉은 기와를
얹은 지붕에는 흰 회칠과 붉은 전돌로 나무 잎사귀를 새겨
넣었고, 이층 지붕의 활처럼 둥그런 가리개에는 황금색과 푸른 비늘에
뿔을 쳐들고 이빨을 드러낸 용두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아래 대문 위쪽의 벽에도 꿈틀거리는 금룡의 부조가 좌우로
번쩍거리고 섬 모양의 검은 무늬 가운데에는 붉은 불길에 싸인 황금색 태양이 빛났다. 대문의 들보는 자개 무늬가 새겨졌고
붉은 기둥에도 무지개 색깔의 용이 구름에 휩싸
여 날아 오르는 형상이 우치나의 전복에서 나온 자개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정문의 위 하얀 회벽에는 사자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며 으르렁거렸다. 궁전의 모든 창은 흰 비단으로 발랐고 여닫을
수 있는 덧문은 붉은 옻칠을 입혀서 햇빛에 반짝였다. 하얀 대리석 계단 위에 금 도금을 입힌 난간이 둘려 있었는데 정면의
좌우로 돌로 깎아 세운 용주(龍柱
)가 우뚝 서 있었다.

 정전의 문 안으로 들어서니 붉은 기둥이 줄지어 늘어선 복도가 나오고 가운데 미닫이가 달린 공간들이 보였다.
정면으로 돌아 들어서니 기둥들의 간격이 훨씬 넓고 검은 흑단 마루는 매끄럽게 윤이 났다.




긴조초 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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