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지어먹는 한그릇 미음죽>
조선시대 왕의 수라상(水剌床)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상으로 이루어졌다.
첫번째 상은 왕 앞의 대원반(大圓盤 ; 커다란 둥근 밥상)이고,
두번째 상은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검사하는 기미상궁(氣味尙宮) 앞의 소원반(小圓盤),
세번째는 왕의 수라를 시중드는 수라상궁(水剌尙宮) 앞의 책상반(冊床盤:네모난 밥상)이다.
수라상의 반찬은 왕의 식성이나 기호에 따라 그 종류와 양이 달라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수라상을 차리는 원칙 안에서만 변용이 가능했다고 한다.
왕의 일상적인 식사는 아침(朝水剌), 점심(晝수라), 저녁(夕수라)의 세 끼 수라 외에 참참이 드는 간식으로 구분되었다.
그외 아침 수라 이전에 가볍게 드는 쌀죽인 죽수라(粥水剌)가 있다.
노노스쿨에서 죽수라 중의 하나인 "장국죽"을 배웠다.
쌀과 표고버섯, 그리고 소고기 다진 것이 주재료이다.
복습겸 일요일 아침으로 다시 만들어 보니 은근한 성취감에 뿌듯해진다.
노노스쿨은 작년 연말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어 신청서를 넣게 되었다.
부부동반으로 연극을 보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친구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내게 모집 정보를 알려주었다.
친구는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가 대학교에 다시 같은 반에서 만난 곱배기 우연으로 평생의 인연이 되었다.
그렇게 필연은 우연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어떤 관계와 운명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연은 필연이 입은 외투라는 말은 옳다.
만원의 지하철에서 발이 밟히는 짧은 우연도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까마득한 근원의 시공간에서
생성되고 오랫동안 준비되어 우리에게 다가와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다만 '우연히' 친구가 되고 '우연히' 정보을 얻고 '우연히' 죽 한그릇을 배우고 만들게 되었다고 느낄 뿐이다.
시인처럼 "이 아침에 지어먹는 한그릇 미음죽"에서조차 우연을 넘어선 필연적 관계의 외연을
깊고 넓게 확장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또 얼마나 신비롭고 그윽해지겠는가.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달리던 노루는 찬 기슭에 무뤂을 꺽고
날새는 떨어져 그의 잠을 햇살에 말리운다
지렁이도 물 속에 녹아 떠내려가고
사람은 죽어서 바람 끝에 흩어지나니
아 얼마나 기다림에 설레이던 푸른 날들을
노루 날새 지렁이 사람들은 저 혼자 살다 가고
그의 꿈은 지금쯤 어느 풀잎에 가까이 닿아
가쁜 숨 가만히 쉬어가고 있을까
이 아침에 지어먹는 한 그릇 미음죽도
허공을 떠돌던 넋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리라
- 이동순의 「서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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