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냄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서울. 하지만 변두리였고 5-60년대 초반까지는 지방의 여느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동 목욕탕이 없어서 목욕을 하려면 버스를 타고 청량리까지 나가야 했다.
어린 시절엔 목욕이 무척이나 가기 싫고 하기 싫은 일상 중의 하나였다.
나는 2남 4녀 중의 다섯째라 좀 크기 전까진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목욕을 가야 했다. 아버지나 형과 함께 목욕탕에 가면 등을 밀어주는 경우를 제외하곤 비교적 내게 자율적인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누나들과 함께 갈 경우는 끔찍 그 자체였다.
누나들은 한 점의 때도 남길 수 없다는 본전 의식에 투철하여 남자들보다 그악스럽게 때를 밀어내는 통에 아버지나 형과 동행했을 때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통보다 더 싫었던 것은 남자인 내가 여탕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우리 친구들 사이에는 창피하고도 모욕적인 일이었다. 더러는 입구에서 남자아이의 여탕 입장 불가를 주장하는 목욕탕 주인들과 실랑이가 벌어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누나들은 "얜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버티며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내가 모르긴 뭘 몰라' 하며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돌이켜 생각해 봐도 여탕 안의 황홀한(?) 풍경 대신에 숨쉬기를 거북하게 만드는 뜨거운 온도와 희뿌연 수증기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만 기억나는 걸 보면 아무것도 모르긴 몰랐던 것 같다.
- 나의 졸저(拙著)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 중에서 -
그러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와 목욕을 다녀오게 되었다. 목욕은 싫지만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의 개운한 기분은 매우 좋아했던 터라 공연히 의기양양해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정거장으로 향하려는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다른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버지가 멈춘 곳은 극장 옆에 있는 '무슨무슨당'(일테면 지금 장충단공원 가까이 있는 태극당 같은.)이라는 간판이 쓰인 빵집(과자점?) 앞이었다. 백열전등 빛이 대낮처럼 유리창을 통해 바깥쪽으로 쏟아져 나오는 곳이었다.
"아!" 뭔가 짜릿한 즐거움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순간 아버지의 손에 등을 떠밀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난로의 열기와 함께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달려들 듯 확 풍겨왔다. 나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아……! 마치 그것은 동화 속에나 나옴직한 냄새였다.
아버지는 따끈한 우유와 나로서는 처음 보는 서양과자와 빵을 사주었다. 그때까지는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올 때 사 오시는 '센베이(せんべい)'나 '오꼬시(おこし)', 혹은 찐빵 등을 집에서 먹는 것이 전부였지 과자점에서 직접 먹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과자나 빵보다도 우선 그 환상적인 냄새에 취했다. 그리고 그 냄새는 60년 가까이 지난 후에도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다.
나는 빵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항상 어린 시절을 그 기억과 그 냄새를 떠올린다. 아니 가끔씩은 그 기억 속의 냄새에 끌려 빵집에 간다.
짜장면 냄새
내 나이 대의 많은 사람들이 처음 짜장면을 먹었을 때를 각별하게 기억한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그 충격적인 첫맛의 기억은 성인이 되면서 점차 희미해지고 소멸되어 차차 여느 보통의 음식과 같이 되었다. 그런데 그 짜장면의 맛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짜장면의 냄새가 성인이 된 내게 강렬하게 부활한 적이 있다.
군에 입대해서 논산훈련소에서 박박 기며 신병 훈련을 받을 때였다.
각개전투 교장에서 돌아오던 저녁 무렵 훈련소 주변에는 늘 짜장 볶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악을 쓰듯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우리들의 눈에 어디에도 중국집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냄새만은 환장할 정도로 코끝을 자극하며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저쪽 골목 안에 중국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모두가 영장 받고 ‘끌려온’ 처지에 낯선 골목 안 지리까지 제대로 알 리가 없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의심할만한 소문이었다.
설사 그곳에 그 '우라질 놈의 짱깨집’이 있다고 해도 왜 저녁 무렵에만 그리 짜장을 볶아대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냄새이거나 다른 음식을 만드는 냄새였는지도 모르겠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장정들에게, 그것도 체력 소모가 심한 훈련을 마친 훈련병들에게, 점심시간에 먹은 짬밥 한 그릇은 너무 빈약한 것이어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선 어떤 환각이라도 빌려와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 훈련병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그 냄새를 짜장 냄새로 규정했고 나중에 휴가를 나가면 반드시 짜장면을 곱빼기로 먹겠다는 야무진(?)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본래 영어공부나 금주금연, 독서 같은 삶에 유용한 일이 아닌 쓸데없는 일에 불굴의 정신력을 보이는 편인 나는 몇 개월 후 자대배치를 받고 면회를 온 어머니와 애인에게 다른 음식을 제쳐두고 짜장면을 고집하는 것으로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고야 만다.
커피 냄새
대학 다니던 칠십 년 대 장계현이라는 가수가 "나의 20년"이라는 노래를 히트시켰다.
거기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 커피를 알았고 낭만을 찾던 스무 살 시절에 나는 사랑했네……"
커피를 안다? 아마 그 의미는 단순히 다방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절 대학에 들어가면 다방이란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과 확연히 비교되는 특권?이었다. 약속을 할 때면 방과 후 학교 앞 무슨 다방에서 보자는 식이었고 미팅을 하는 장소도 다방이었다.
사실 그 시절 다방은 어느 다방이나 요즈음 우리가 농담조로 말하는 한결같은 맛의 '다방커피'를 팔았고 뮤직박스의 DJ가 틀어주는 음악이 클래식이냐 대중가요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현재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이 그 시절 다방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갖고 있다.
나와 친구들은 커피보다 술을 좋아하여 대학 시절 내내 다방보다 학교 앞 골목 튀김집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 다방은 주로 지금의 아내인 애인을 만날 때나 가보는 장소였다.
무교동 어름에 있던 "아가페"란 이름의 다방이 기억이 난다.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조용한 곳이었다.
80년 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들르던 어느 풍물패에서는 '커피 안 마시기'를 일상 활동 수칙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외에 '청바지 안 입기, 나이키신발 안 신기' 따위의 수칙도 있었다.
'제국주의 문화적 침략의 산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회사일로 미국에 주재를 하면서부터였다.
출근하면 직원들을 따라 커피 내려 마시다 보니 습관이 되었다. 골프를 친 뒤 뒤풀이도 종종 별다방에서 했다. 처음에는 별다방의 커피가 너무 진해서 뜨거운 물을 달래서 희석시켜 먹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마셨고 잔의 크기도 톨(TALL)에서 라지(LARGE)로 진화를 하였다.
점차 집에서도 커피는 필수가 되었다. 귀국을 해서도 커피의 일상은 이어졌다. 특히 카페인과 상관없이 숙면이 가능한 나는 술을 마신 후에는 밤늦은 시간에도 커피로 입가심을 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그러나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은 커피 자체보다 커피 냄새이다.
커피점을 열고 들어갈 때 기다렸다는 듯 훅 끼쳐오거나 커피잔을 입에 가까이 가져올 때 잔잔하게 풍겨오는 냄새는 어린 시절 빵집의 그것처럼 따뜻하고 매혹적이다. 미국에서 밤새 운전을 하여 먼 곳으로 아내와 여행을 떠날 때면 출발 전 별다방에 들려 큰 잔의 커피를 뽑아 운전석 옆에 두곤 했다.
운전 중 마시기도 하거니와 남은 커피에서 차 안으로 확산되는 냄새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근래에 일주일에 한 번 커피에 관한 수업을 듣는다. 커피에 관한 개론적 수업이라지만 내겐 가히 커피공학이라 할 만큼 세분화되고 깊이가 있어 보여 어렵다. 건조한 과학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는 커피 한 잔에 '커피도(道)'라 할 정도의 장인적인 진지한 공력과 감성도 담겨 있는 듯했다. 커피는 원산지별로 고유한 맛에 더하여 커피 원두를 볶는 과정이나 분쇄의 정도, 물의 종류와 온도, 물의 속도나 양, 드립퍼의 종류에 따라 같은 커피라도 다양한 맛이 나왔다.
커피를 즐긴다고 하지만 여전히 믹스 커피에 달달한 비스킷 찍어 먹는 걸 좋아하는 유아적 입맛의 내게 그런 커피의 속성과 세밀한 미각의 의미가 무엇일까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수업 내내 맡는 커피 냄새가 그냥 좋을 뿐이다.
그래서 먹고 남은 시음잔을 코에 대고 자주 킁킁거려 보기도 한다.
입안에서 느끼는 혀끝의 맛이거나 코로 맡는 냄새 거나 음식의 즉물감은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간다.
우리에게 남는 건 기억이라는 긴 여운뿐이다.
어린 시절 우연히 들어갔던 한 과자점의 기억이 냄새를 촉매로 평생 동안 이어지고 젊은 시절 훈련병의 고된 생활은 짜장의 냄새에 실려 현재로 소환되기도 한다. '커피를 알아서 낭만'을 찾을 때의 커피 냄새는 더욱 다양한 기억들로 비산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어디 음식뿐이랴. 우리가 접하는 모든 순간들이 그렇다. 지나고 보면 덧없지만 기억으로 남아 각별해진다. 그럴 때 기억은 현재를 담아내는 그릇이거나 미래를 규정하는 틀이 된다. 어느 길에서 우연히 우는 아이와 마주쳤을 때 달래주지 않고 지나치면 그때 그 길의 그 아이는 영원히 우는 모습으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생떽쥐베리였던가?
오늘은 수타짜장 한 그릇을 천천히 비우고, 후식으로 정성스레 내린 커피 한 잔과 함께 잘 구워 달콤한 과자 한 조각을 옛날처럼 머금어 볼까? 그리고 지나간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내어 봄햇살 가득한 창밖의 거리에 조금씩 흘려보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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