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에 빠진 적이 있다. 미국에서 살 때였다. 주말이면 자주 아내와 캠핑을 갔다.
내가 살던 캘리포니아는 일 년 내내 캠핑에 더없이 좋은 날씨를 가진 곳이었다.
산과 들, 바다와 계곡, 어디건 작은 비닐 천막을 쳐놓으면 보금자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20여 년 전 등산을 다닐 때 쓰던 낡은 텐트였지만 둘이서 하루나 이틀을 자는 덴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어두워지면 파이어링(FIRE RING)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주위의 풍경들이 어둠 속으로 완벽히 풀어질 때까지 불가에 앉아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밤이 깊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촘촘히 돋아나 있었다.
우리가 '캠핑장의 힐튼호텔'이라고 불렀던 바닷가 캠핌장에서는 파도소리가 더해지기도 했다.
그럴 즈음이면 우리는 어떤 신비로운 몽환경(夢幻境)으로 감미롭게 빠져들었다.
"아!"
일상에서는 잘 쓰지 않던 이 짧은 단어를 얼마나 많이 허공으로 던졌던가.
그 탄성 한 마디로도 얼마나 많은 내면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가.
아내와 나는 우리가 경험한 판타지를 주변에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한두 가족씩 캠핑장에 초대를 하여 우리가 체험한 경이의 시간을 함께 한 적도 있다. 나중에 그들 중 일부는 우리 보다 더한 캠핑광이 되기도 했다. '실용적인 마술'이 만들어내는 풍요로움은 전염성이 강하다.
음식만들기 역시 내게 또 다른 몽환경으로 쉽게 옮겨가는 순간 이동의 마술이다. 조리를 하는 동안은 재료와 그 재료들의 변신과 변신의 결과물인 음식과 음식을 함께 나눌 대상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다. 다른 일상의 행위에서 이보다 더 집중력 있고 아늑한 시간을 얻기는 쉽지 않다.
캠핑의 경우처럼 나는 은퇴 후 주변 친구들에게 조리를 권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이번 요리는 비빔면과 더덕생채.
노노스쿨의 선생님은 비빔국수에는 분식집 분위기가 풍기지만 골동면(骨董麵)은 어딘가 '있어'보인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쉽고 편한 말이 좋다.
게다가 비빔국수에는 이름이자 요리에 대한 설명까지 들어있지 않은가.
골동면은 비빔밥을 뜻하는 예전의 '골동반(骨董飯)'에서 왔을 것이다.
골동반은 '마구 뒤섞여 있는 밥'을 뜻하는 ‘혼돈반(混沌飯)’으로도 불렀다.
당연히 중국에서 건너온 표현이겠다. 기록상의 표현은 중국에서 건너왔겠지만 우리나라엔 예전부터 비빔밥은 있었다. 제사나 잔치, 혹은 들일을 할 때 갖가지 반찬과 나물을 비벼 먹었다. 조리 선생님은 원래 우리의 비빔국수(비빔밥)는 국수를 삶아 고명을 얹어내어 나중에 비벼 먹는 '비빌 국수'가 아니라, 애초에 비벼서 내는 '비빈 국수'였다고 했다. 가르쳐주신 '비빈 국수'는 통상적인 고추장이나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간장양념로 비빈 것이었다.
완료형인 '비빈'에서 미래형인 '비빌' 국수로의 전환은 해방 이후 외식문화가 정착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국수나 밥이 장(醤)에 닿으면 금방 삭기 때문에 미리 비벼 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고명으로 쓰이는 고기채가 간 고기로, 희고 노란 지단이 달걀프라이로 변화한 것도 대량 생산이 필요한 사업이 되면서 전통에서 변화된 모습이라고 했다. 집밥과 식당밥이 구분되는 경계선이기도 하겠다. 아무튼 올해 노노스쿨의 조리 학습은 나의 '실용적인 마술'의 원천이다.
미녀의 나신 절단하기
손수건으로 비둘기 만들기
신문지를 지폐로 만드는
마술은 질릴 만큼 했다
이제 좀 더 실용적인 마술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의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안마해 주기
배추로 김치 만들기
오천 원으로 푸짐한 밥상 차리기
실용적인 마술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눈속임이 아니라 사랑의 힘
실패했다고 야유할 사람은 없지만
한 달간 맛없는 김치를 먹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할 것
그렇다고 실용적인 마술을 겁낼 필요는 없다
김치를 씻어 쌈을 싸 먹거나 전을 해먹는
마술에 도전해 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오늘도 무궁무진한
실용적인 마술의 세계에 빠져 있다
실용적인 마술이 손에 익어
마술이 아니라 생활이 될 때까지
그녀의 실용적인 마술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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