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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발밤발밤46 - 강화도 돌아보기

by 장돌뱅이. 2019. 6. 4.

십여 년만에 강화도를 다녀왔다. 미국 근무 등으로 생긴 오랜 공백이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다.
우선은 강화도까지 가는 길이 변했고 도로 주변의 풍경도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강화도에도 곳곳의 변화가 확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의 생각도 변해 있었다.


우리옥
가장 최근에 우리옥을 다녀온 것이 2006년이다. 그때 나는 이곳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423 )


"강화 읍내의 우리옥은 유명한 식당이다. 반세기 동안 한 곳에서 백반집으로 명성을 이어온 탓이다.
강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다 안다.
읍내 거리 시장 안 좁은 골목길에 있어 주차도 할 수 없고
식당의 안팎도 허름하지만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유는 음식의 맛과 푸짐한 주인장의 인심 때문이다.

가격도 착실하다(?). 백반 1인분에 4천원, 대구찌게(소) 3천원, 병어회 9천원 등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나온 밑반찬이 없지만 특히 비지찌게의 맛이 더없이 구수하다.
뼈째썰기로 나오는 이 집의 병어회를 초장에
찍어 먹는 맛도 좋다."


*위 사진 : 2006년 2월의 사진

이번 여행 첫 방문지는 우리옥이었다.
느긋하게 서울에서 출발한 탓에 도착하자 식사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해 가장 큰 변화가 있는 곳이었다. 우선 예전의 허름했던 건물에서 깔끔한 2층 건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우리옥의 명성을 있게 한 백반은 질적인 면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차라리 6천원이란 가격을 조금 현실화 하더라도 좀 더 충실한 접시를 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백파 홍성유의 맛집으로도 유명했던 강화를 대표하는 식당 중의 하나였는데·····.
식당을 운영하는 할머니는 여전히 살가움이 가득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는 힘에 부치는 걸까? 




용흥궁
"복권 선전 문구에 '인생역전'이란 말이 있다. 촌에서 농사 짓던 무지렁이가 어느 날 갑자기 천하를 호령하는 임금이
된 경우라면 적절한 사레가 될까? 어릴 적 라디오로 듣던 연속극 '강화도령' 철종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1849년 6월, 조선 24대 왕이었던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헌종과 7촌 관계인 철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때 강화도령 철종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 중이었다.

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된 것은 궁중 세력 다툼이 만들어낸 정치적인 산물이었다.
따라서 철종은 즉위 초기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에도 세도정치의 폐단은
여전하여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잦은 민란과 정치·사회적인 혼란에 시달린 탓인지
철종은 재위 14년 만인 186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강화도의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으나 철종 즉위 뒤에 용흥궁으로 부르고 다시 지은 것이다."
- 이상 나의 책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 중에서 -

이번에 용흥궁의 본채 마루에 앉아 나는 그의 인생을 로또에 비유한 것에 마음 속으로 사과를 했다.
그가 왕의 생활에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영조의 고손자이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그리고 정조의 이복동생이 할아버지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 14세가 되는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친형이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살아왔을 어린 그에게 왕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인생은 조금씩 어긋나는 법"이라는 누군가의 말만으로 그의 심중을 헤아려보기가 쉽지 않다.


성공회 강화성당
"일전에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에서 예수가 살던 시대의 두개골을 골라 첨단 법의학 기법과 컴퓨터로 예수의 모습을
복원해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고 생각해 오던 예수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우리가 그림에서 보아오던 인자하고 지적인 인상의 다소 마른 듯한 예수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수염이 텁수룩하고 얼굴이
통통한  전형적인 중동인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컴퓨터로 복원한 예수가 실제의 모습인지 아닌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관념 속의 예수상이란 것도 실제와는 상관없는 그림이나 영화 등 사회적인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도 그렇다. 르네상스 이전에 그려진 모습은 동네 아줌마나 시골 처녀를 연상
시키는 푸근하고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르네상스 이후 '영원한 구원의 여인상'의 이미지가 강조되면서 점점 더 우아하고
늘씬한 미인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교회나 성당의 형태에 대한 나의 고정 관념도 같은 예가 될 것이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 카드에  자주 나오던 눈 덮힌 마을의 뾰족한 고딕식 첨탑과 그 끝의 십자가. 교회나 성당을 말할 때
나는 대게 이런 그림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이런 점에서 성공회 강화성당은 특이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성당의 외양이 앞서 말한 나의 선입관과는 달리 우리 전통 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아마도 성당의 건축 형태만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특이한 성당일 것이다. 1900년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 주교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이 성당은 정면에서 보면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어 사찰 건물처럼 보인다.
내부는 서구식 예배 공간으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동서양의 양식이 합쳐진 성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이상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 중에서 -

만유진원(萬有眞原).
"천지만물을 있게 한 참된 근원"이라는 성당 내부 제대 뒤 중앙에 붙어 있는 글.
지금의 세상은 여전히 그분이 '보시기에 좋은 곳'일까?
세례받은 지 수년이 지났으면서도 여전히 냉담자인 나는 자주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산다. 





고려궁터
"고려는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1232년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개성의 궁궐을 본떠 새 궁궐을 지었다.
지금의 고려궁터는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9년 간 고려왕조가 머물렀던 자리이다. 궁궐은 환도 후 불에 타 없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 그 자리에 행궁을 건립하고 관아 건물인 강화유수부 등을 세웠는데 대부분의 건물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다시 불타 없어진다. 지금의 고려궁터는 작고 한적한 공원처럼 가꾸어져 있어 옛 고려궁이나 조선행궁의 자취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근래에 복워된 몇 채의 건물이 새 건물다운 색감을 풍기며 서 있을 뿐이다.
그 중 외규장각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아담한 건물에 주목하게 된다. 건물의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외규장각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조선은 국가의 중요한 기록이나 서적을 간직하는 창고인 사고(史庫)를 오대산, 묘향산, 태백산, 강화도 등지에 지었다.
특히 강화도는 전쟁이 있을 때 국왕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기에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하고,
그때까지 강화도에 분산되어 있던 책들을 비롯해 서울의 궁성으로부터도 중요한 기록과 책들을 옮겨왔다.

그러나 1866년 프랑스가 강화더에 침입하여 외규장각에 있던 책 중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200여 종 340책을 약탈하여 갔다.
(중략) 프랑스는 제2차 세게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약탈당했던 수많은 문화재를 끈질긴 요구 끝에 1994년 대부분 돌려받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문화재에 적용했던 논리를 우리의 문화재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적어도 그들은 '똘레랑스'라는 미덕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닌가. 고려궁터 안에 복원된 외규장각 건물은 그처럼 내용물을 채우지 못한 탓에 화려한 단청에도 불구하고
아직 쓸쓸해 보인다.
- 이상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 중에서 -

역사적 내력은 풍성하나 눈에 보이는 것은 별로 없는 유적지의 빈 공간은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아내와 돌계단에 앉아 바람에 초여름 더위를 식히며 잠시 그런 상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간은 감미롭다.
그래서 여행은 복되다.





카페 갈릴리
카페 갈릴리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세 시간 가까이 앉아있었다.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은 아내와 바다 바라보기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바다를 보고 커피를 마시다 바다를 보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또 바다를 보았다.
그러는 사이 바다 안개가 밀려왔다가 흘러가고 잠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간 다시 뽀얀 안개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우리네 삶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을 생각했다.
이해는 쉽지만 받아들이기에는 정말 어려운 말이다.
그 말로 아내를 위로하기는 더 어려웠다. 그냥 조용한 침묵이 나아보였다.
아직까지는. 


토가
마음에 두었던 장화리에서 일몰은 짙은 안개로 볼 수 없을 것 같아 예정보다 일찍 귀가를 하기로 했다.
강화도를 떠나기 전 토가라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순무와 곁들여 먹는 새우젓두부찌개와 된장찌개의 맛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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