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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차(茶)에 대한 주절주절2

by 장돌뱅이. 2019. 7. 7.

노노스쿨에서 커피에 이어 듣는 차에 관한 강의가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앞선 글 "차에 대한 주절주절 ( https://jangdolbange.tistory.com/1823 )" 에 덧붙여 본다.


차에 대하여
차는 차나무 잎만이 아니라  온갖 식물의 뿌리나 줄기, 열매를 달이거나 우려내는 음료 모두를

통틀어 이르므로 커피에 비해 우선 원천 재료가 훨씬 많아 보인다.
거기에 다른 재료와 혼합하는, 이른바 '브렌딩(BLENDING)'이라는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해지므로
이를 통하여 만들어내는 새로운 맛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음식이나 음료나 '퓨젼'이 대세인 것 같다. 커피와 차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식음료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의 본질이 '퓨전'이긴 하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시(詩)도 있지 않던가.
 


*위 사진 : 차 수업 시간에 만든 아이스밀크티


이제까지 내게 커피나 차는 그 본연의 맛을 음미하는 기호음료이기보다는
마주 앉은 사람과의 대화를 위한 보조수단의(?) 의미였을 뿐이다.
차 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마 앞으로도 내게 차가 그 이상의 의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업무 출장으로 태국 방콕에 다시 간다면  아무 생각없이 고객의 선택에 따라 가야 했던 
TWG 카페를
그때와는 다른 기분이 되어 좀 더 적극적으로 앞장 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차나 커피를 나눌 때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몇마디 '뻥'을 칠 수도 있으리라.
사실 단어 이상으로 아는 것도 없지만 카푸치노와 라떼의 차이를 말하고 '바디감'을 언급하거나
'니들이 세계 3대 차를 아니?' 라며 다소 허풍스럽게 잔을 들어 
친구들을 '촌놈'이라 놀리면 아마
야유
비슷한 것이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자리가 시끌벅적해지며 활기도 생겨날 것이다.
지금의 내가 무엇을 배우건 그런 소소한 즐거움 이상을 탐하면 욕심이 될 뿐이라고 믿는다.
 



레몬그라스(LEMONGRASS)에 대하여

수업 중 생소한 이름으로 가득한 차의 재료 중에 아는 이름도 더러 나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아는 만큼 들리기도 한다.

레몬그라스는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태국 음식에 많이 들어가 귀에 익은 이름이다.
우리나라 쪽파와 비슷하게 생긴 레몬그라스의 태국 이름은 "탁라이"이다.


레몬그라스는 태국의 유명한 수프인 "똠얌꿍"에 필수재료이다.
술 마신 뒷날
해장 속풀이에 그만인 "똠얌꿍(SPICY & SOUR PRAWN SOUP)"의 시큼한 맛이 여기서 나온다.
태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깽끼오완(GREEN CURRY)"에도 들어간다고 한다.
레몬그라스 치킨은- 닭고기에 레몬그라스를 넣고 함께 튀긴 것이다.


*위 사진 : 똠얌꿍


*위 사진 : 깽끼오완


*위 사진 : 레몬그라스 치킨


레몬그라스는 요리뿐만 아니라 마사지를 할 때 오일로도 쓰이고 화장품은 물론 쥬스의 재료도 된다.
어린 잎은 차가 된다. 레몬그라스 차는 성질 따뜻하고, 피로회복, 신경 안정 등에 좋다고 한다.


*위 사진 : 레몬그라스 차

레몬그라스는 태국음식점 이름으로도 자주 쓰인다.
태국이 원산지인만큼 태국과 태국인의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도 되겠다.


*위 사진 : 방콕의 식당 레몬그라스. 꽤 오래된 식당인데 지역 재개발로 근자에 문을 닫았다.


*위 사진 : 미국 라스베가스 아리아(ARIA)리조트 부속식당 레몬그라스

 

찻잔((茶碗)에 대하여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가 되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원로 코미디언이었던 서영춘씨의 재담으로 기억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차(茶)가 아무리 좋아도 잔이 없으면 못 마신다. 차와 찻잔은 '이심동체'이다.

아내와 나는 차보다 찻잔을 비롯한 도자기에 관심이 있다. 박물관에 가면 도자기 전시관을 빼놓지 않는다.   
어떤 그릇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림이나 음악에서 얻는 감동을 넘어선다.


*위 사진 : 새삼 설명이 필요없는 고려 청자상감 운학무늬 매병
             고고한 비색(翡色)과 선적(禪的)인 고요함이 서린 격조가 고고하다.
             원 무늬 안쪽의 학은 위로 향하고 바깥쪽 학은 모두 아래로 향한 질서감도 눈길을 끈다.
      


*위 사진 : 백자철화 끈무늬 병 - 소탈하면서도 해학적인 조선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위 사진 : 조선 백자 달항아리는 자연스런 기형이 주는 넉넉한 형태미와 어진 선맛, 그리고 따뜻한 백색으로 
            
조선 선비들의 고고한 지성과 서민의 질박함을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우리는 흔히 도자기라고 말하지만 도자기는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를 합친 말이다. 유약을 발라 1300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을 자기라 하고 이보다 낮은 온도에서 만든 연질의 그릇을 도기라고 한다. 

9세기 무렵 중국에서 도자 문화가 들어온 이래 기술적인 한계로 조악한 품질의 그릇을 생산하던 고려인들은
12세기들어 각고의 노력으로 고려청자라는 아름다움의 한 정점에 도달하며 세계 도자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던 14세기 무렵부터 고려청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 좋은 청자를 만들려는 조형적 긴장과 예술적 의지가 약화되었고 그런 청자를 또 세상은 받아들였다. 
결국 예술은 시대상의 반영이다.  "하나의 자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라의 만사가 모두 이를 닮는다"는
말은 이 경우 정확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틀림이 없이 들어맞는다.

설상가상으로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면서 해안변에 위치해있던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문을 닫게 되었다.
도공들은 흩어졌고 위대한 고려청자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흩어진 도공들은 생활의 필수품인 그릇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관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오히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들만의 개성과 정서를 그릇에 심을 수 있었다.
빈약해진 제작 환경으로 저하된 자기의 품질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도공들은 마침내 백토를
이용하여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자기인
분장회청사기(紛粧灰靑沙器) 즉 분청사기를 만들어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우리 전통 미학의 기조에 가장 잘 들어맞는 분청사기에는 소박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현대적 감각이 넘쳐났다.

유명 도예가였던 영국인 버나드리치는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 시대 분청사기가 이미 다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다인(茶人)들이 분청사기의 매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문화가 지향하는 미적 목표는 적막함, 쓸쓸함, 스산함의 미학이었다. 
그런 미의식을 추구하는 다도인(茶道人)들은 조선의 분청사기의 무기교의 소탈하고 무념무상의 선적인
분위기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당시 
다완의 명품을 얻기를 원하여 심지어 어느 성주(城主)는 자신의 작은
하나와
분청사기 다완 하나를 맞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분청사기를 미시마(三島), 하케메(刷毛目), 고히키(粉引), 가타데(堅手), 고모가이(熊川), 아마모리(雨漏),
이도(井戶) 등으로 미세하게 분류하였다.
 


*위 사진 : 미시마 다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다두(茶頭)로 모셨던 리큐(利休)스님이 사용했던 다완이라고 한다.


*위 사진 : 이도 다완. 조선 시대 서민용 막사발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로 지정된 다완.
             다도인들 사이에선 '야취(野趣)와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고 극찬을 받는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문화의 본질은 '퓨전'이다. 고여있지 않고 흐르는 것이다. 고립되지 않고 합쳐지는 것이고
견고한 고체가 아니고 녹아 흐르는 액체인 것이다. 희랍 신전의 기둥이
이집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서
그 가치가  낮아지지 않듯이 중국으로부터 도자 문화가 들어왔다고 해서 고려 상감청자나 조선 분청사기의 위상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자기 문화의 원조가 우리라는 자기 기만의 '원조타령'은 권위는커녕 위안도
얻지 못하는 '자뻑
'일 뿐이다.

우리에게서 기술을 배워간  일본은 불과 1∼2백 년 만에 세계 도자사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립시키고 결국에는
값싼 가격의 자기로 우리의 도자기 문화를 고사시켜 버렸다. 우리 선조들이 성취한 수준 높은 경지의 문화는 분명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성취의 역사만큼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성취의 역사가 제대로 이어지고
발전되지 못한 우리의 지난 역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실패와 단절의 역사 역시 성공의 역사만큼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졸저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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