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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25 - 이성부의「벼」

by 장돌뱅이. 2019. 7. 5.


도시농부 수업 시간에 벼를 심어 봤다.
2리터 팻트병을 잘라 흙을 넣고 벼 몇 포기를 심는 간단한 실습이었다.
논에 가득한 벼만 보다가  물병 속에 담긴 벼를 보니 옹색하기 그지 없었다.
몇 사람이 교실 한 쪽에 줄을 세워 모아놓으니 그나마 벼다운 벼를 보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물을 채워 바람이 잘 통하고 해가 잘 드는 곳에 두라고 했다.
물과 바람과 햇빛도 벼 속에 녹아 스며들어 벼를 키우는 환경이자 자양분이라는 뜻이겠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  접경 라다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라다크인들은 나무 한 그루를 고립된 존재로 분리해서 보지 않고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그것을 흩날리게 하는 바람, 나무를 지지해 주는 대지 등과 관계하는 존재로 본다고 한다.
나아가 모든 주변 환경을 나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우주 만물이
바로 나무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본질이라고 믿는 것이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래서 위대하다는 당위를 얻는다.
서로에게 스며들어 낱낱이 우주이며 그리고 동시에 전체로도 하나인 우주이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환경 속에 살면서도  라다크인들이 내면적 풍요를 키우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데는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를 중시하는 그런 지혜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이성부의 시 「벼」는 70년 대라는 엄중한 정치적 상황 아래서 화두였다고 할 수 있는
이 땅의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오늘은 그냥 '논 속의  벼'로도 읽어본다.
라다크인들의 지혜를 빌리면 벼는 사람의 부분이고 사람은 또 벼의 한 부분이므로.
결국 벼는 사람이고 사람이 벼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므로.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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