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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29 - 안도현의「건진국수」

by 장돌뱅이. 2019. 8. 1.


*위 사진 : "봉화묵집"의 건진국수


*위 사진 : "안동국시"의 건진국수


이십여 년 전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안동 여행을 갔다가 건진국수를 처음 먹었다.
건진국시는 이름대로 칼국수처럼 얇은 국수가락을 만들어서 삶은 다음, 찬물에 헹궈 건져내고
미리 만들어 식힌 육수에 말아내는 안동 지방의 전통 음식이다.


아내는 그다지 특별하게 기억에 남을 만큼의 맛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나는 더운 여름에 시원한 육수에 잠긴 칼국수처럼 썬 수제 국수발의 맛이 인상적이었다.
입안에서 툭툭 끊어지는 특이한 식감은 국수 반죽에 콩가루를 넣어서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여행 이후로 건진국수를 먹을 기회가 없었다.
안동여행도 여러번 갔지만 더 이상 건진국수를 파는 곳을 만나기 힘들었다.
일반 칼국수에 비해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 일로 안동에 주재했던 친구에 의하면 자기가 아는 한 안동에 딱 한 곳이 있는데
시내와 떨어져 있고 사전에 주문 예약이 필수라고 했다.

시인 안도현의 건진국수에 대한 시.

건진국수에는 건진국수, 라는 삼베 올 같은 안동 말이 있고 안동 말을 하는 시어머니가 여름날 안마루에서
밀가루반죽을 치대며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있고 반죽을 누르는 홍두깨와 뻣센 손목이 있고 옆에서 콩가루를
싸락눈처럼 술술 뿌리는 시누이의 손가락이 있고 칼국수를 써는 도마질 소리가 있고 멸치국물을 우리는 칠십
년대 녹슨 석유곤로가 있고 애호박을 자작하게 볶는 양은냄비가 있고 며느리가 우물가에서 펌프질하는 소리가
있고 뜨거운 국물을 식히는 동안 삽짝을 힐끔거리는 살뜰한 기다림이 있고 도통 소식없는 서방이 있고 때가
되어 사발에 담기는 서늘한 눈발 같은 국수가 있고 찰방거리는 국물이 있고 건진국수 옆에 첩처럼 따라붙는
조밥이 있고 열무며 풋고추며 당파를 담은 채반이 있고 건진국수에는 누대의 숨막히는 여름을 건진국수가
안동 사람들을 건졌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같은 시인의 건진국수 칼럼도 있다.
두 글 모두 칼럼이라 해도 되고 시라도 해도 되고 레시피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건진 국수는 안동지방 사람들이 여름에 해먹는 별미 음식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뜨거운 여름을
나기 위한 지혜가 이 음식에는 배어들어 있다. 더운 국물보다 서늘한 육수가 그리울 때 그만이다.
건진 국수는 칼국수를 만드는 방법과 똑같은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멸치국물을 미리 끓여 차가워질 때까지 식혀 놓는 일이 중요하다. 애호박도 볶아 놓고
달걀 지단도 부쳐 둔다. 양념간장을 최대한 뻑뻑하게 만들어 준비한다. 그리고 밀가루 반죽으로
칼국수를 만들 때 반드시 콩가루를 듬뿍 넣어야 한다. 그래야 면발이 진득거리지 않게 되고
콩가루의 고소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건진 국수를 먹을 때 면발이 툭툭 끊기는 느낌이 날 정도로
콩가루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끓는 물에 칼국수를 넣고 익으면 건져서 찬물에 몇 차례 헹구는 것,
이게 건진 국수와 일반 칼국수의 차이다. 옛날에는 금방 펌프질해서 길어 올린 물에다 헹궜지만
요즘은 정수기에서 받은 물이면 충분하겠다. 물기를 뺀 국수 가락을 그릇에 담고 준비해 둔 찬 육수를
부어 먹으면 입에서 시원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더위가 한 십리는 물러간다.
이 건진 국수를 먹을 때는 조밥이 애인처럼 옆에 따라붙어야 한다. 조밥은 식은 밥일수록 좋고,
먹다 남은 국물에 말아서 먹으면 된다. 별다른 반찬 없이 열무와 풋고추와 가는 파를 된장에 찍어 먹으면 안성맞춤.

예전과 달리 안동에 가도 건진 국수를 파는 집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쉽다.
                                              - 한겨레신문 칼럼, 2013 07 02 -


'숨막히는 여름, 안동사람들을 건졌다'는 건진국수.
지난 겨울 정릉에 가는 길에 들렸던 "봉화묵집"에서 여름철에 건진국수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친 김에 검색을 해보니 압구정동에 있는 "안동국시"의 건진국수도 유명했다.
초여름부터 아내와 가보자고 졸라 이번에 두 곳을 다녀왔다.
두 곳 다 '첩처럼 따라붙는 조밥'이 없어 서운(?)했다.


"봉화묵집"의 건진국수 모양도 맛도 투박하다. 잔 기교가 없다. 옛날 어머니가 해주던 맛이다.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몇 젓가락 맛을 보기 전에 그 '무(無)맛의 맛'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봉화묵집의 할머니는 말씀을 찬찬히 그리고 조용조용히 하셔서 좋다.
정감이 있다.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진다. 음식도 할머니를 닮았다.
아내는 이곳의 건진국수 대신 묵밥을 최고로 꼽는다.

압구정동의 "안동국시"는 압구정동'답게' 같은 건진국수라도 세련된 맛이다.
봉화묵집보다는 양념과 고명의 맛이 강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은근하다.
다양한 종류의 건진국수가 있었을 것이므로 어떤 것이 정통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집에서 가기가 봉화묵집보다 편하기도 하거니와 사철 건진국수를 내므로 더 자주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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