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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인도네시아에 관한 두 편의 영화

by 장돌뱅이. 2019. 9. 5.


직접 살았던 곳은 책으로 읽거나 여행으로 스쳐간 곳 보다 더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다.
적어도 관심의 정도는 그곳에서 생활한 시간에 비례하여 커지기 된다. 
인도네시아나 미국, 멕시코 등이 내겐 그렇게 다가온다.
회사 일로 주재를 한 곳이라 텔레비젼에서 그곳 소식이 나올 때면 특별히 주목하게 된다.
뉴스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소설, 운동 경기도 그렇다.

최근 인도네시아에 관한 영화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과 「침묵의 시선 THE LOOK OF SILENCE」를 보았다.
양민 학살에 관한 잔인한 내용의 다큐멘타리였다.
같은 감독(조슈아 오펜하이머)이 만든 두 편의 영화는 같이 반 세기 전의 인도네시아를 이야기한다.

1965년 9월 30일 일단의 병력이 여섯 명의 최고위 군장성을 납치해 살해했다.
일종의 친위 쿠데타 주도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를 수호하기 위해
"반 수카르노 친서방 장성위원회를 선제 타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수카르노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당시 수하르토 소장이 이끄는 군부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후 이어지는 30여 년 간의 수하르토 철권 통치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9월 30일 사태 관련 사망한 사람은 모두 12명이었지만 군부는 쿠데타를 공산당의 전국적인 단위의 음모로 몰아갔다.
살해당한 장성들의 사진과 장면 묘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동시에 쿠데타와 공산당의 연관을 부각시켰다.
여론은 격앙 되었다. 이로 인해
1965년 10월 경부터 자바에서 시작된 학살은 1966년 사이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군부는 지방 민병대("Pemuda Pancacsila" 빤짜실라 청년단)를 조직·지원 했다. 그리고 학살은 주로 이들에 의해 행해졌다.
평소 공개적으로 행동한 공산주의들의 체포는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미 대사관 측은 5천 여명의 공산주의자로 혐의자들의
명단을 인도네시아군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 하지만 피해는 공산당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단순히 공산주의자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또는 그냥 의심이 간다는 심증만으로도 처형이 되었다.
심지어는 개인적인 복수극을 벌이기 위해 공산당을 구실로 삼기도 했다
.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중국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무고한 화교들도 표적이 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무슬림청년단들이 기독교 성직자들이나 교사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간 사회 저변에 있던 모든 종류의 갈등이  9.30쿠테타와 상관없이 폭력적으로 분출되었다.
정확한 사망자는 알 수 없다. 백만 명 정도에서 점점 늘어나 2백만 명에서 3백만 명까지 추정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 주재 시절 중년의 현지인 매니저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 없다. 기본적으로 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내가 대답하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 말했다.
"공공의 장소에서 그런 말 절대하지 마라."
"왜? 내가 무신론자라고 떠들일은 없지만."
"혹 광신도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공산주의자라 믿고 해를 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나는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는 어린 시절 겪었을 학살의 공포에 여전히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지금은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믿음의 정도는 여전히 얕지만.)

방국가들은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학살과 숙청을 대체로 공산주의에대한 승리로 간주했다.
냉전의 시대에
좌경적 제3세계 노선을 지향했던  수카르노보다는 친서방 성향의 수하르토를 선호했다.
호주의 해롤드 홀트(HAROLD HOLT) 수상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50만에서 1백만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쫓겨났다면 바람직한 방향전환"이라고 했고,
미국무부정보관료인 하워드 페더스필(HOWARD FEDERSPIEL)
공산주의자들에게 일어난 일인데 그들이 찢겨 죽었던 잘려 죽었던 누가 신경이나 쓰겠소?" 라고 했다.
2015년 에델란드 헤이그에 설치된“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를 다루기 위한 국제인민재판소의 재판관
작 야쿱
(ZAK YACOOP)미국, 영국 그리고 호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 반인권 범죄의 공범들이라고 했다.

영화에 나온 당시의 처형단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마치 무용담처럼 이야기 했다.
온갖 잔혹한 살인에 대해 즐거운 추억을 회고하듯이 설명했다.
이런 식의 설명이 자주 나온다.


"우리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들 항문에 나무를 쑤셔 넣었다. 우린 나무 사이에 그들의 목을 끼워 부셔뜨렸다.
우리는 그들을 목매달았고 전선으로 목졸랐으며 목을 베고 그들 몸을 차량으로 깔아 뭉갰다. 우린 뭘 해도 되었다
그 증거로서 우린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서 행동했다. 공산주의에서 나라를 구한 애국자다."
"공산당들은 신을 믿지 않으며 부부관계도 바꾸어 가며 하는 윤리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다."
"이제와서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뭐하자는 것인가."
"그때는 그때의 논리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청년단원)은  군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아니다 우리(군부)는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 시민들이 분노하여 자발적으로 행한 일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1949년 1월10일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이종영은 1930년 대
만주에서 애국지사 50여 명을 체포하고 십여 명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가 주장했다.
"공산당을 타도하였다고 재판하는 이 법정에서 나는 재판 못 받겠다. 공산당을 타도하였다고 재판을 받는다면 
여기 앉아 있는 재판장 자신이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같은 애국자를 심판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자를 처단할 수 없다."

광주항쟁 직후인 1980년 5월28일자 조선일보의 사설은 '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사설에 썼다.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반면에 <AFP> 통신의 5월24일 기사는 광주의 상황을 다르게 설명했다.
'군의 노고'가 아니라 '야수적 잔인성'이 언급된다.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캄보디아를 능가한다."

우리는 어느 글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 누가 '이 반인권 범죄의 공범'인가 알고 있다.
이제 인도네시아건 우리나라건 그런 시절에 비해 얼마나 나아진 것일까? 생각해 본다.
아, 제발 정치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마라.
죄없는 사람 죽이고 정치라고 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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