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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53 - 정끝별의 「첫눈」

by 장돌뱅이. 2019. 12. 4.



올해 첫눈이 내렸다.
눈이 내렸다고 했지만 허공에 반짝이는 흰 비늘 몇 조각만 보았을 뿐이다.
그나마도 땅에 닿자마자, 아니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린 듯 흔적도 없어졌다.
오후에 아내와 양재시민의 숲을 걸었다.
단풍은 거의 지고 눈은 쌓이지 않은 초겨울의 숲은 적요로웠다. 
우리들이 나누는 목소리 사이로 우리가 내딛는 발자국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최근에 텔레비젼에서 아프리카에 사는 치타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본 적이 있다.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르게 달린다는 치타의 사냥 성공율은 겨우(?) 20%라고 한다.
다섯 번에 네 번은 심장이 터질 듯한 전속력으로 달려도 실패를 하는 것이다. 
실패와 거기에 따르는 허탈은 일상의 대부분일 터이다.
하지
만 그의 생존은 20%의 성공에 달려 있다.
거기에 새끼 치타가 어른이 될 때까지의 생존율은 10%라는 설명은 삶의 처절함을 실감나게 한다. 
어디 치타뿐이겠는가.

모든 존재에게 삶은 낮은 생존과 성공의 확율로 경영해 내야하는 엄정한 숙제이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달.
돌아보는 지난 시간엔 늘 그렇게 상투적이고 진부한 실패의 기억들이 고여있다.
지난 해 이맘때 가 그랬듯.
또 그 전 해 이맘때가 그랬듯.


그래도 사는 일에 쉽게 물리지 않는 건 예상치 못한 「첫눈」 같은 환희의 순간이 남기는 여운 때문일 것이다.
실패와 아픔의 기억이 반드시 같은 크기의 성공과 기쁨이 있어야 상쇄되는 건 아니다.

'무섭게 굴러가던 것들이 일제히 제 둥근 모서리를 쓰다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내려앉는',
'누군가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에 쌓이는', 그런 시간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산책을 마치고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숲 근처의 카페 "꼰띠오(CON TIO)"로 갔다.
카페의 주인장은 올해 시민기자 학교에서 나에게 글쓰기 수업을 해준 멘토였다.
수업 시간에 그는 깨알 같은 글씨로 꼼꼼하게 적은 메모장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글은 바로 그 메모장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글은 기억에서 오지 않고 기록에서 온다"는 충고가 있.
그는 그 충고의 성실한 전형(典型)으로 보였다. 

그는 카페 주인이면서 바리스타이다. 또한 커피에 관한 글을 쓴 작가이다.
이전에는 커피 회사의 브랜드 매니저, 프로그래머, 디자인 전략, UX 등의
알듯 모를 듯한 다양한 이력을 거쳤.

*주인장이 최근에 쓴 책, 「커피 오리진」


카페 안은 아담하고 따뜻했다.
벽에는 그가 편집한 영상이 움직이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커피는 주인장이 평소 자랑할만한 맛을 증명해 주었다.
주인장이 쓴 책에 사인을 받는 재미도 있었다.
손님이 없는 사이사이 공식적인 수업 시간에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격의 없이 편안 시간이었다.





날선 삿대질을 되로 주고 말로 받던 그밤의 창가에

느닷없는 점령군처럼 함박눈이 내렸것다!
눈과 눈이 부딪치고 쨍그랑 겨누던 무기를 놓쳤던가
그랬던가? 어둡던 창밖이 우연의 남발처럼 환해지는
저건, 대체 누구의 과장된 헛기침인가
그래서 서로의 눈이 창밖을 마주보게 되었던가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가 흰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우산을 든 여자가 어룽이는 네온싸인에 사뿐사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오토바이를 세운 폭주족이 크라운베이커리 앞에서 라이터 불을 지피고
달리던 자동차가 멈칫 쌓인 눈을 털어내며 천천히 미끄러져가고
무섭게 굴러가던 것들이 일제히 제 둥근 모서리를 그렇게 쓰다듬고 있더란 말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내려앉으며
누군가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에 쌓이며
첫눈 뜬 장님처럼 서로 눈을 맞추고 말았더란 말인가
염치를 잊고 손을 내밀고 말았더란 말인가
그러니, 보고 또 봐도 물리지 않는
아, 저건 누구의 신파였고
누구의 한물간 낭만적 연출이었던가
창밖에 펼쳐진 저 포근한 단막의 해피엔딩에
저리 저 첫눈에
또 그리 속아넘어가고 말았더란 말인가

-정끝별의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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