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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베트남

2019 호치민1 -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

by 장돌뱅이. 2020. 1. 6.

베트남 호치민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책꽃이에서 베트남 관련한 책들을 꺼내 보았다.
주로 젊은 시절에 읽은, 주제가 한결 같이 베트남 전쟁에 관련한 책들이었다.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베트남전쟁)』,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보 우엔 지압의 『인민의 전쟁 인민의 군대』,구엔 반 봉의 『사이공의 흰 옷』,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쟝 라꾸뛰르의 『베트남의 별』, 방현석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 등등.

물소의 맨등에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어둠을 발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소년들의 뒷모습에는 범접해서는 안될 삶의 근원적인 그 무엇이 서려 있었다. (···) 이 길의 주인은 처음부터 물소와 소년들의 것이었을 것만 같았다. 그들에게는 비킬 수 있는 길도 없었지만, 비켜야 할 이유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그들에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껌뻑일 권리는 없었다. 불빛이 마을의 존재를 드러내고 물소들이 하나둘 집을 찾아 흩어지면서 길이 열렸다.
- 방현석의  중편「랍스터를 먹는 시간」중에서 -

친구에게 『전환시대의 논리』를 소개 받아 읽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머리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불꽃이 펑펑 터지는 것 같던.

나(프랑스 드골 대통령)는 그에게(미국 케네디 대통령)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이 지역에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당신은 끝없는 미로에 빠져들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한번 눈을 뜨고 궐기한 다음에는 아무리 강대한 외부적 세력도 그 의사를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부의 현지 지도자들이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와 목적에서 당신을 섬길 생각이라 하더라도 민중은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당신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도차이나의 민중은 당신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를 당신의 지배욕과 동일시 한 것이다.
(···) 당신에게 한마디 더 충고하고 싶은데, 그것은 아무리 돈과 인원을 인도차이나에 쏟아넣어도, 오히려 그럴수록 당신네들은 그곳에서 밑이 없는 군사적 정치적 늪 속으로 몸을 가눌 수 없게끔 한 발 한 발 빠져들어갈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불행한 아시아와 아시아의 민족들을 위해서 당신이나 우리나 그리고 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 민족이나 국가의 살림살이를 우리가 떠맡는 일이 아니라, 그 곳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정횡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을 낳게 하는 원인인 인간적 고통과 욕된 상태에서 그들이 빠져나올 수 있게끔 도와주는 일이다."

- 이영희의 『베트남전쟁』 중에서-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은 암시장이란 전쟁의 이면을 통해 오히려 전쟁의 본질을 보여준다.
소설 속 베트남인은 간단한 질문 한 마디로 전쟁을 정리한다.
"전쟁은 가장 냉혹한 장사의 형태가 아닌가요?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들까지 말이오."
월남전에 관한 소설이나 시, 영화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다.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 가이사의 것, 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 곰팡이꽃, 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이다. 달러, 그것은 제국주의 질서의 선도자이며 조직가로서의 아메리카의 신분증이다. 전세계에 광범하게 펼쳐진 군대와 정치적 힘 보태기, 다국적 기업망의 그물로 거두어진 미국 자본의 기름진 영양 보태기, 지불과 신용과 예금의 중요한 국제적 매개체로 정착된 달러 보태기, 다국적은행의 번창 등의 결함 위에 피빛 꽃은 피어난다. 

혁명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극적인 사건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혁명전사는 일상과 싸우고 일상 속에서 수없는 자기결단을 쌓아나가야만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라야 극적인 사건들을 유도할 능력이 생긴다. 마치 한사람의 소작인이 수세대 동안 침몰 되어온 비참한 삶의 연속 끝에 항거의 무기를 드는 것처럼, 혁명은 찬란한 섬광이 아니라 돌과 같은 침묵의 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전사는 꽃 같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무관심의 광야 속에 내던져진 돌멩이다. 드디어 한 돌멩이는 무더기를 이루어 부딪쳐서 반짝이고 또한 구르고 날아가. 전신이 무기가 되는 것이다. 

팜 민은 머리털이 곱슬곱슬하고 치열이 가지런하던 교사 출신의 동료를 떠올렸다. 그의 시체가 지금쯤 중부 산악지대의 어디에 누워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이제는 나무와 풀숲의 덩어리 가운데서 거기가 베트남의 어느 곳인지 모두 잊어버렸다. 시체가 일어나서 걷지 않는 한 그것은 그 잊혀진 자리에서 도마뱀과 파리떼에 뒤덮여 소멸되어 갈 것이다. 폭격에 맞아 가족들의 곡성에 둘러싸여 죽음을 당하는 것과는 달랐다. 게릴라는 이름도 정체도 과거도, 그리고 얼굴도 없는 자가 아닌가. 탄이 말하고 있었다.
"알리지 못하는 게 아니야. 우리의 죽음은 베트남 민족해방에 바쳐지는 거야. 그러므로 네가 죽음을 알리고 싶어야 할 곳은 단 한군데······ 민족해방전선뿐이다. 신념없는 죽음처럼 참혹한 것은 없어."

-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 중에서 -

반레는 1966년 열일곱살의 나이로 자원 입대를 하여 10년 간 미국과 싸웠다. 함께 입대한 3백 명 중 1975년 종전때까지 다섯 명만 살아남았다. 반레라는 이름은 작가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레 찌 투이'다. 반레는 죽은 295명 중의 한 명이다.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은 미군 총탄에 죽은 주인공 빈과 같은 해방전사인 애인의 손에 살해된 꾸에지라는 두 영혼이 각자의 생을 돌아보며 풀어내는 이야기다. 소설은 전쟁이 주는 참혹함이나 비장함을 넘어 어떤 시련에도 파괴되지 않는 숭고한 인간 정신을 따뜻하게 보여준다. 혹 그것을 반레 개인의 품성을 넘어 베트남의 저력이고 자신감으로 읽어도 될까?

"다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태양이 뿌려주는 햇살 속을 걸어다닐 수 있다면, 들판에 내리는 빗속에 흠뻑 몸을 적실 수 있다면, 하늘이 천둥을 치면서 산천을 흔드는 것을 다시금 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저는 원래 원한 같은 걸 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원한 때문에 복수를 꿈꾸지도 않았구요.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원한은 인간의 영혼을 불구로 만들 뿐이죠. 원한은 단지 인생을 질식시킬 뿐이에요!"

"저희는 우리에게 없는 것들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 거예요. 저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과 더불어 독립해서 살거예요. 환생을 해서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되는 걸 더는 바라지 않게 되었어요. 저는 결코 망각의 죽을 먹지 않을 거예요. 가족과 고향, 절친한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제가 살아온 날들을 잊고, 인간의 삶에서 제가 받았던 그 아름다운 정감들을 모두 잊으면서까지 얻고 싶은 것은 없어요."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중에서 -

그리고 김명인이 쓴 70년대의 시 「베트남」을 읽었다.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
베트남을 통해 아프게 확인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을 것이다.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짚이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 3 부인
남편은 출정 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
속에서도 가랭이 벌여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을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는냐

-김명인의 시, 「베트남 I」 -

책 표지조차 이미 낡고 변색될 정도로 '진부한' 이야기들이라 이젠 좀 뜨악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가벼운 휴식을 위한 여행을 앞두고 읽기에는 무거운 내용이라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두서없이 책의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진 부분을 위주로 들춰보았다. 오래 전 그 밑줄을 긋던 젊은 시절이 문득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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