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박용래의 「겨울밤」-
고향.
머지 않아 사라지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고향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근원적 모태로서의 포근함과
어느 날 가슴을 찌르며 되살아나는 추억과 회귀를 재촉하는 정서는 사라지고,
다만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만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제게 고향의 의미가 그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선산이나 친척들은 물론, 어릴 적 친구들도 모두 그곳을 떠나버려
명절이라고 해서 굳이 찾아갈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놀던 개천은 복개되어 차 다니는 대로가 되었고,
산은 허리께까지 아파트에게 자리를 내주어 옛일을 돌아볼 근거마저 사라져버린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출생지라는 사실을 빼곤 서울의 여느 낯선 동네와 다를 바 없는 곳입니다.
고향의 의미가 축소되면 명절마다 뉴스를 장식하는 귀향이란 단어도 어쩌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 자주 듣고 사용하던 - 시렁, 툇마루, 추녀, 싸리나무 울타리, 외양간, 고무신, 낙숫물,
싸락눈 들이치는 소리 등등 - 단어와 표현이 지금의 일상에서는 낯설게 변해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제게 명절은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자마자 돌아와 출가한 딸아이네 가족을 맞는 날입니다.
그리고 네 살배기 손자친구와 허리가 시큰하도록 노는 날입니다.
물론 그 즐거움은 사라진 고향에 대한 애석함 따위(?)를 덮고도 남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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